[TV] 드라마 "대행사"는 실제 대행사와 얼마나 비슷할까? 30년차 광고인의 이야기
TV 잘 안 보는 저도 수요일엔 "나는 솔로"를,
주말엔 "일타 스캔들"에 이어 본방 사수합니다. ^^
아무래도 제가 일하는 업계다보니 관심이 가더라구요.
다만 초반엔 좋았는데 중반부턴 좀...
그래도 본 김에 꾸준히 시청 중. ㅎㅎ
저는 LG그룹 광고회사 'LG애드(현 HS애드)'와
독립광고회사 '웰컴'에서 대행사 경험을 했고,
현재는 후배와 함께 '파크프로덕션'이라는
광고영상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속에서 다뤄진 내용들과
실제 광고업계 이야기 살짝 해볼게요.
먼저, 업계 1위 'VC기획'은 '제일기획'을 연상시킵니다.
Victory와 Cheil을 합친 이니셜일까요? ㅎㅎ
물론 제일기획은 삼성그룹의 광고대행사니
VC그룹처럼 요거트를 만든 적은 없습니다. ^^
이보영이 맡은 주인공 고아인 CD 캐릭터는
제일기획의 최인아 CD님을 모델로 한 것 같아요.
이름부터 뒤집어서 지은 게 바로 보이죠?
삼성그룹 최초 여성 임원인 것도 그렇고
우리나라 광고업계에서 유명한 카피라이터 출신
CD(Creative Director, 제작팀장)인 것도 겹칩니다.
최인아 CD님은 부사장까지 재직하고 은퇴하셔서
현재는 '최인아책방'을 운영하고 계시죠.
회장 딸이라는 이유로 부임한 강한나 상무는
살짝 이건희 회장의 딸 이서현 씨가 떠오릅니다.
실제로 미국 파슨스에서 디자인을 공부했고
패션에 안목이 있으며 제일기획 전무로 입사했었죠.
현재는 제일기획을 떠나 삼성복지재단과 리움미술관을 운영합니다.
각 화의 오프닝이나 중간중간에 나오는 자막들 중에
실제 광고 카피가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사자가 자세를 바꾸면 밀림이 긴장한다" 같은 게 대표적.
이 카피는 "말하기를 말하기" 등 여러 책의 저자이기도 하신
김하나 작가께서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시절 쓰신 카피죠.
메르세데스-벤츠 S 클래스 신형 출시 광고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가장 멋진 신제품 출시 광고 카피 중 하나.
저도 LG애드 시절 벤츠를 담당했었어요.
그때 만든 신문광고 중 하나입니다.
S 클래스의 'Pre-Safe'라는 신기술을 알리는 광고.
사고 위험을 감지하면 안전벨트, 시트 등이
알아서 작동하는 운전자 보호 기능이에요.
뛰어난 기술이지만 사실 가장 좋은 건
그런 위험한 상황 자체를 만나지 않는 거겠죠.
그래서 저런 역설적인 카피를 썼습니다.
드라마다보니 실제와 다른 부분도 당연히 있어요.
최장수 기획본부장과 척을 지면서 매출 50%를 늘린다?
현실에선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기획과 제작은 한팀이에요.
천하의 천재 CD라 할지라도 기획의 도움 없인 일 못합니다.
CD들이 일반 기업처럼 창문 쪽 자리에 앉은 건 맞기도 틀리기도.
제일기획이나 이노션, HS애드 등 웬만한 대행사들은
CD에게 방(겸 회의실)이나 파티션으로 독립된 공간을 줍니다.
물론 드라마에서처럼 오픈된 공간에 책상을 두기도 해요.
아... CD가 마세라티 르반테를 타는 일도 거의 없는... ㅎㅎ
제가 재직했던 20여 년 전에 그런 우스개가 있었어요.
CF 촬영장에 광고주는 쏘나타 타고 오고
대행사 CD는 그 윗급 그랜저류 타고 오고
프로덕션 CF감독은 3시리즈나 C클래스 타고 오고
모델은 스타크래프트 밴이나 S클래스, 포르쉐 타고 온다는. ^^
프로덕션 감독이 일하다 불려나와 술을 사는 것도
요즘은 거의 사라진, 과거의 잘못된 관행입니다.
저희 회사만 해도 대행사랑 어쩌다 밥이라도 먹으면
늘 대행사에서 결제해요. 감사팀에 걸리면 큰일난다고.
다만 여전히 그렇게 술 얻어먹는 곳도 있긴 할 겁니다.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지만 제가 알기론 2~3%나 될까요?
야근하거나 밤새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그건 현실. ㅋ
일의 특성상 일정에 맞춰 빡세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에 일이 없으면 늦게 출근하든 일찍 퇴근하든 자유.
금요일 늦은 오후에 일 던지는 건 종종 겪어요.
이건 정말 고쳐져야 하는데.... 어쩔 수 없기도 합니다.
광고주가 그렇게 던지니 대행사도 덕션에 던지고... 악순환.
예전에 모 이동통신사 연간 캠페인을 준비한다고
크리스마스부터 새해 연휴까지 다 출근한 적도 있어요.
12월 31일 밤 11시 넘어 트윈타워 전체에 저희 팀만 일했던. -.-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에 아이디어 회의 하고
CD께서 담날 10시에 다시 아이디어 보자고 하셔서
"내일 크리스마스인데요"라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더니
"아... 그러네. 그럼 4시에 회의하자"라고 하셨다는 전설도. ㅎㅎ
극중 고아인 CD처럼 뛰어난 팀장을 만나는 것도 복입니다.
일은 정말 미친듯이 많이 해야 하지만 그만큼 성과도 크거든요.
저도 모셨던 CD님이 업계에서 아주 유명하셔서
좋은 브랜드도 맡고 광고상도 여럿 받았었습니다.
지나고보면 광고상 뭐 이런 게 큰 의미는 없습니다만...
유원그룹 광고 경쟁 프리젠테이션(PT) 장면은
실제 PT 현장과 상당히 비슷하더군요.
대기 공간에서 기다리다 차례가 되면 들어갑니다.
발표 순서도 뽑기 등으로 공정하게 정하고요.
다만 현장에서 발표 순서를 바꾸던데 그건 극을 위한 픽션.
실제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발표 순서는 첫번째나 마지막을 선호해요.
중간에 끼는 게 가장 불리합니다.
아무래도 듣는 심사위원들도 지루해지니까요.
PT 공간은 대개 시청각 기기들이 설치된 대형 회의실인데
10인 전후 작은 데서부터 30인 이상 큰 곳까지 다양합니다.
제가 겪어본 가장 큰 공간은 강당이었어요. ㅎㅎ
정부기관의 프로젝트였는데 회의실을 못 구해서
100명 정도 들어가는 강당에서 PT를 했습니다.
강당 무대 위 단상에서 발표해보긴 처음이자 마지막. ^^
드라마에서 유원그룹 회장 딸이 테이블에 다리를 올리죠.
요즘은 갑질 운운으로 거의 보기 힘듭니다만
예전엔 오너 일가들이 무례한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주 드문 경우고요, 대부분은 매너 있게 PT를 받아요.
PT 듣다가 조는 분들은 있습니다. 피곤하거나 재미없거나. ㅋ
94년 겨울에 입사했으니 30년 가까이 일해왔네요.
돌이켜보면 '광고' 일을 해서 늘 행복했습니다.
제 전공이 경영학인데 평범한 기업 들어갔으면
과연 지금처럼 포르쉐를 탈 수 있었을까요? ^^
게다가 양복 안 입어도 되죠, 출퇴근 자유롭죠.
대행사는 그나마 조직이라 10시 정도엔 나오는데
저희 같은 프로덕션은 12시~1시에 출근합니다.
12시 넘어 나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저 혼자 밥 먹기도. ㅎㅎ
일만 잘하면 그 외에는 전혀 터치하지 않는 문화예요.
사회 생활하면서 아침에 알람을 맞추지 않는다는 것.
이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저희 직원들과도 늘 이야기합니다.
가장 행복한 것은 '매번 하는 일이 새롭다'는 거예요.
어떤 때는 자동차를, 어떤 때는 맥주를, 어떤 때는 휴대폰을.
그래서 힘들기도 하지만 분명 행복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물론, 아이디어가 잘 나온다는 전제 하에서죠. ㅋ
P.S. 1
본문의 지면 광고들은 대행사 시절의 작품입니다.
운 좋게 대한민국 최고의 디자이너와 파트너가 되어
좋은 광고 많이 만들었었네요. 지금도 친구로 지냅니다.
이 친구는 신문광고, 잡지광고 등을 만드는
지면 프로덕션을 20년 가까이 해왔는데
심지어 사무실도 바로 근처에 있어요. ^^
P.S. 2
최근 저희 회사에서 만든 CF 2가지입니다.
첫번째는 카스맥주 광고예요.
"ㅇㅇ는 어렵지 않다"라는 카피도 좋고
하현상의 곡 "등대"도 따뜻하게 와닿았던.
이 아이디어는 대행사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아이디어 시작부터 같이 할 때도 있고
다 정해진 콘티를 제작만 할 때도 있어요.
광고회사 '온보드그룹', 제작사 '파크프로덕션', CF감독 '바닐라'.
https://youtu.be/QaO7rmT0QyI
두번째는 미용의료정보 앱 바비톡 광고입니다.
요즘은 대행사 없이 광고주와 바로 연결되어
제작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바비톡도 그런 케이스.
"톡 까놓고 말해볼까?"라는 카피와
다나카 특유의 유머가 잘 어우러져
젊은 층에서 엄청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 콘티는 저희 회사에서 생각한 것이고요.
이렇게 반응이 뜨거우면 일하는 보람이... ^^
광고주 '바비톡', 제작사 '파크프로덕션', CF감독 '박영환'.
https://youtu.be/umiaLPm3huA
https://youtu.be/bktWL2CJqQY
https://youtu.be/_OTBTSex2q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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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저도 요즘 재미있게 시청하고 있는 드라마인데 드디어 현업에 계신
gilsunza님의 리뷰(?)가 올라왔군요 일단 선추천 누르고 정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