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 마음과 네 마음의 연결
페로몬의 작용 속에서 꿀벌은 다른 꿀벌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꿀벌들을 설득된 꿀벌로 만든다.
이 말이 준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출장갔다 온 꿀벌이 출장복명을 하면서 이차저차하니 요래요래해서 이렇게 해야됩니다~ 보고를 완벽하게 한다해도 상대를 '설득된 꿀벌'로 바꾸는 것은 언어유희 속에서나 가능하겠으나, 언어의 효율성을 따지는 예라면 느낌이 다릅니다.
말을 글자로 적은 문장은 평면 위에 긴 줄을 지어 늘어서며, 거기에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 말로 표현되는 우리의 마음에 관해 말한다면, 그것은 시작과 끝을 가진 긴 줄이 아니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중 '영화 <컨택트>에 붙이는 짧은 글'이라는 부제를 단 [시간과 기호를 넘어서서]를 읽으며 독서의 보람,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같은 영화를 보고 형언키 어려운 생각을 하도록 만든 감독의 천재성에 감탄했는데 형언된 글을 읽으니 저는 말문이 트인 듯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듯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 <컨택트>의 외계인의 먹물글을 생각해보시라.
마음은 때로는 들판이고 때로는 물속이며, 때로는 시간조차 들어올 수 없는 막장 탄갱의 어둠이다. 입은 동시에 '두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은 한꺼번에 둘 이상의 시간을 수직으로 품으며, 우리는 그 수직의 시간을 '시적 순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음은 다른 시간들을 수직으로 품지만 말은 시간을 겹쳐놓지 않는다는 의미는 긴 줄로 늘어서는 말,글 문장과 그렇지 않은 마음의 특성을 다시 설명한 것입니다.
말은 시간을 겹쳐놓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 그 자체인 말이 있다면, '떡'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떡이고, '바람'이 바람이고, '돌'이 돌이라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시의 언어는 '바람'이라고 말할 때 바람 그 자체가 되려고 한다.
친절하게 말과 생각의 배열차이를 길게 설명한 것은 아마도 영화의 먹물글과의 연계 때문인데 이미 있는 선조성(Liniearity, Linearitaet)이라는 용어입니다. 검색 링크로 가시면 간단한 설명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읽지 않았습니다.
https://www.google.com/search?q=%EB%A7%90%EC%9D%98+%EC%8B%9C%EA%B0%84%EC%A0%81+%EC%84%A0%EC%A1%B0%EC%84%B1&oq=%EB%A7%90%EC%9D%98+%EC%8B%9C%EA%B0%84%EC%A0%81+%EC%84%A0%EC%A1%B0%EC%84%B1&aqs=chrome..69i57.4153j0j15&sourceid=chrome&ie=UTF-8
이 영화와 책을 통해 선조성이라는 언어의 특징을 초월한 그러니까 인간언어한계를 넘는 외계언어에 대한 상상력을 볼 수 있습니다. 테드 창과 빌뇌브 감독의 착안점은 외계인은 한번에 중첩된 시간과 데이터의 관계와 데이터, 그러니까 데에터를 언어에 담아 시간순인 스트림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 느낌, 역사, 문제점, 대책, 그래서 어쩔래? 가 종합된, 한번에 콘퍼런스를 마쳐버리는 대화였습니다. 우리 식이라면 뇌를 바꿔치는 정도의 데이터이전인데요. 그래서 다른 꿀벌을 설득된 꿀벌로 만드는 페로몬의 작용을 언급하셨겠죠.
저도 상상력에 충격받기 좋은 순서로 영화 먼저, 책 나중으로 접했습니다.
말의 시간적 선조성에서 해방된 어떤 유토피아에 관해 말하는 이 서사를 테드 창의 단편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기 전에 영화를 통해 먼저 알게 된 것도 행운에 속한다.
이 쯤에서 다시 황현산님이 영화 보고 책 읽고 감상글 쓰고 나서 추천한 트윗을 돌아봅니다.
좀 늦었지만 이책을 추천한다. 영화 <컨택트>의 원작소설이 들어 있어서 유명해진 이 책에서는 철학적으로건 미학적으로건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상상력을 만날 수 있다.
[시간과 기호를 넘어서서] 글에서 인간은 시를 통해 언어를 구사한 시간의 중첩이 가능함을 모색합니다. 제게는 철학적으로건 미학적으로건 새로운 글이었습니다. 원래 아는 게 없으면 나날이 배움이 즐겁습니다.
시는 헵타포드들의 먹물 원처럼 독서의 어떤 프로그램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하나의 의미를 일관되게 파악하며 그것을 다른 의미에 접합시키도록 도와줄 어떤 지표도 제시하지 않지만, 시를 더듬어가는 시선 속에서 의미와 지표가 동시에 생산되고 동시에 뒤바뀐다. 그래서 상형시에 대한 우리의 독서가 그 의미 생산의 과정에서 방황하는 것처럼, 상형시 역시 그것이 지각하고 표현하려는 사물들의 중간에, 지각과 표현의 중도에 있다. 그 효과는 우주적이다. 다시 말해서 기호 이전의 사물인 페로몬의 효과와 같다.
아폴리네르의 상형시 맛의 부채를 통해 우주적인 효과, 페로몬의 효과를 지닌 헵타포드의 언어와 시의 가능성을 동등하게 다루면서 글을 마쳤다가, 한번 더 음미를 하셨는지 2편이 이어집니다.
아폴리네르 상형시 '맛의 부채' 입니다.(블로그 맨 아래 사진)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yyllssll&logNo=221629693409
[시간과 기호를 넘어서서] 2편에서 황현산님은 언어의 특질에 대해 좀 더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벤야민이 말했다는 '자연이 인간에게 소통할 언어가 없다는 것은 자연이 갖는 커다란 아픔, 모든 슬픔에는 말없음의 깊은 경향이 내재한다.'를 인용하시며 "그러나 벤야민의 말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그 소통의 존재 여부나 방법이나 내용이 아니라 미학적 위엄이다."라고 하십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소통은 말을 의미하고 미학적 위엄이라는 것은 의미 전달을 초월한 Sync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제 감상을 모두 쓰지 못합니다. 너무 많기 때문이고 쓰다가는 황현산님의 짧은 글을 모두 옮기는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벤야민의 말에 나오는 자연의 슬픔을 인간에게 대입하시면서 '자연만큼 슬픈 인간은 공간을 박차고 나갈 수도 없고 시간을 뛰어넘을 수도 없다."고 하셨지만(이 부분에서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를 연상^^)
이 짧은 글의 말미에는 미학적 위엄을 느끼게 하는 다음 말씀을 하시고 그것을 테드 창의 소설에 헌사합니다. 테드 창의 소설을 다시 읽을 이유를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상상력'과의 만남에서 찾아야겠습니다.
한 사람의 삶은 우주 전체의 삶이며,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시간은 그것이 아무리 짧아도 영원에 이르는 시간이다.
제가 인용하지 않았지만 랭보 시의 번역에 대한 경험과 통찰을 결부한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책방에 서서 잠깐만에라도 볼 수 있는 분량이기도 하고 내내 곁에 두고 통찰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리마인더로 소장할 만한 책이기도 합니다. 지식의 분량이 문제가 아니고 지식을 중첩하는 것(시간 중첩 흉내입니다)을 황현산님에게서 배웁니다.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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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입니다.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