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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롤랑 바르트 - 수전 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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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11-11 00:17:06

Under The Sign of Saturn(우울한 열정/ 수전 손택)에는 1980년에 쓴 Remembering Barthes(바르트를 추억하며)라는 같은 해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롤랑 바르트 추모글이 실려 있습니다. 수전 손택이 바라본 바르트에 대한 글을 읽는 마음이 잔잔하면서 깊습니다. 


Put him in front of a cigar box and he would have one, two, many ideas— little essay. It was not a question of knowledge (he couldn’t have known much about some of the subjects he wrote about) but of alertness, a fastidious transcription of what could be thought about something, once it swam into the stream of attention. There was always some fine net of classification into which the phenomenon could be tipped.

그를 시가 상자 앞에 앉히면 하나, 둘, 많은 아이디어, 즉 작은 에세이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그는 자신이 쓴 주제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단 관심의 흐름에 휩쓸리면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경각심의 문제였습니다. 그에게는 현상을 분류할 수 있는 미세한 분류망이 항상 존재했습니다.(By DeepL)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흐름에 휩쓸리면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경각심의 문제라고 손택이 말해주는 바람에 일천한 지식과 호기심의 콜라보에 열심인 스스로와 제 글을 비춰봤습니다. 미세한 분류망이라는 말 또한 (책구경하느라) 도서관 분류표를 외우다시피 했던 제게는 익숙한 표현입니다. 제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던 유형의 글을 더 이상 읽지 않게 된 것도 요즈음입니다. 가시 돋친 글은 역겨운 글만 못합니다.


벤야민 책의 번역자 노트에서 인상적인 문구 중의 하나는 벤야민은 귀족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반골성향을 꺾지는 못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외부데이터를 받아들일 때 일단 스캔하고 시스템중립임을 확인하는 작업이 일반적인 컴퓨터환경이 된 것을 이해한다면 더욱 복잡한 인간의 사고흐름 또한 마찬가지로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His sense of ideas was dramaturgical: an idea was always in competition with another idea. Launching himself onto the inbred French intellectual stage, he took up arms against the traditional enemy: what Flaubert called “received ideas,” and came to be known as the “bourgeois” mentality; what Marxists excoriated with the notion of false consciousness and Sartreians with bad faith; what Barthes, who had a degree in classics, was to label doxa (current opinion).

그의 아이디어에 대한 감각은 극적이었습니다. 하나의 아이디어는 항상 다른 아이디어와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근친 교배의 프랑스 지식인 무대에 뛰어든 그는 전통적인 적, 즉 플로베르가 '수용된 사상'이라고 부르며 '부르주아' 사고방식으로 알려지게 된 것,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거짓 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사르트르주의자들이 악의라고 비난한 것, 고전을 전공한 바르트가 독사(현재의 의견)라고 명명한 것 등에 맞서 무기를 들었습니다.

 

His debunking forays, which presumed the readiness to be made indignant by inanity, obtuseness, hypocrisy—these gradually subsided. He was more interested in bestowing praise, sharing his passions. He was a taxonomist of jubilation, and of the mind’s earnest play.

무모함, 어리석음, 위선에 대해 분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폭로전은 점차 가라앉았습니다. 그는 칭찬을 건네고 열정을 나누는 데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환희와 마음의 진지한 놀이에 대한 분류학자였습니다.


국내 출판된 '우울한 열정'을 읽지 않았지만 대체로 읽기 힘든 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서 영어 문장의 단어조합은 흔하지 않은 리듬감이 곁들여진 현란한 비유가 들어있고 그 느낌이 한자단어 섞인 번역체로 옮겨졌을 때 의미는 바로 전달된다 하더라도 손택이 원래 의도했던 계산된 음정과 정교한 파동으로부터는 멀어지지 않았나 혼자 곱씹습니다.(히이워저 택써미이스터어브 주우빌리에이션~읽어보니 당연한 말이네요. 영어는 영어이고 한글은 한글이다.)


번역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제가 글을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이런 문장을 발견하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화분을 키우며 새싹을 보듯,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관찰하듯, 가지가 뻗어가는 모습을 좇듯 말입니다.


Everything he wrote was interesting—vivacious, rapid, dense, pointed.

그가 쓴 모든 글은 활기차고, 빠르고, 밀도 있고, 핵심을 찌르는 등 흥미로웠습니다.


영문, 한글 모두 표음문자입니다. 각 문장을 읽을 때 쓰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쓰는 사람이 소리를 염두하고 문장을 구성했을 때 문장이 전달하는 뜻과 함께 배경음악처럼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앞뒤 단어가 저 멀리서 떼로 달려오는 시고르쟈브르종 강아지들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한글로 읽을 때는 활기차고 빠르고 밀도 있고 핵심을 찌른다는 뜻은 잘 알겠는데 vivacious, rapid, dense, pointed를 읽을 때의 즐거움은 없습니다. 귓속 어딘가를 골고루 주물러주는 느낌의 단어조합이 번역하면서 의미전달에 치중하게 되고 의미가 같은 단어가 수배되어 소집된다 해도 단어들의 상성은 영어의 그것과 궤를 같이하지 않습니다. 모든 번역을 통틀어 전달불가능한 영역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진지하게 제 독서습관을 돌이켜봤습니다. 이전처럼 영문만 읽지 않고 번역을 해보고 영문을 곱씹어보고를 되풀이합니다. 이런 시도는 스스로를 좌절하게도 만들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시간이 야속합니다)


벤야민의 글(독일어 못해서 아쉽)에서 정신과 시선을 따르고 바르트의 글(불어 못해서 아쉽)을 즐기며 손택의 글(그나마 영어라 다행)로 객관화합니다. 영어로 벤야민과 바르트나 손택을 읽는 그 행위자체와 여운을 한글로 적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쓸데없는 작업이면서 좋게 말하자면 제가 즐기는 유리알 유희 아닌가 합니다.


제게 벤야민의 책을 읽어나가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공부입니다. 그가 약관도 안 된 나이에 쓴 짧은 에세이조차 그 열 배 이상의 글을 읽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잠시 손택의 바르트에 관한 글을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But the rhythm accelerated in the last decade, with a new book appearing every year or two. The thought had greater velocity. In his recent books, the essay form itself had splintered—perforating the essayist’s reticence about the “I.”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그 리듬이 빨라져 1~2년에 한 권씩 새로운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생각의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그의 최근 책에서는 에세이 형식 자체가 쪼개져 '나'에 대한 에세이스트의 과묵함을 드러냈습니다.


한글 번역문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아우토반을 달리는 듯하던 문장이 가속하다가 결국  파편으로 부서지는 느낌을 위 영어문장에서는 느낄 수 있습니다. 파편들을 엮어낼, 꿰뚫다(perforate)란 단어를 써서 눈앞의 열린 공간에서 에세이스트가 움직이는 모습이 떠오르는 환각을 느낍니다.(애니메이션 환타지아에서 미키 마우스가 지휘봉을 휘두르는 것 같은, 영화 타르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말러를 지휘하는 모습 같은, 떠오르는 모습은 취향 따라 다릅니다)


언어에는 우열이 없습니다, 오해없기 바랍니다. 한글이 우월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글 또한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자신의 언어를 다루는 손택의 능수능란함이 멋지다는 말입니다. 이 뒤로도 엄청납니다. 제 표현이 상대적으로 저속하지만 이런 말 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읽다가 던져놨는데 손택의 글을 읽다 보니 '사랑의 단상'을 먼저 읽었어야 했군요. 영문 제목은 A Lover's Discourse: Fragments입니다. 이쯤 읽으셨다면 눈치채셨겠지만 이제 제 글에 외부링크는 되도록 삼가려 합니다. 목차 같은 filler를 나열하는 것 또한 부득이한 경우 말고는 피할 것입니다.


정보화시대에 찾으면 있는 것을 복붙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게으른 짓은 없겠다고 반성했습니다. 목마르면 물을 마셔야겠죠. 정보화시대에 필요한 것은 갈증입니다. 손택이 바르트를 묘사한 여러 문장들에서 본받아 '마땅한' 덕목들이 은연중에 있습니다. 삶의 자세, 작가로서, 학생으로서 등의 바람직함을 좋은 글은 강요하지 않으면서 가르칩니다. 그렇지 못한(않은) 경우를 질타하지 않습니다. 내로라하는 사람의 좋은 글을 찾아서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영어를 읽으면서 좋은 예를 접하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좋다'라는 것은 저마다 다를 것이지만 외국어인 영어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나 표현을 즐기는 것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의 정신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벤야민을 회고했던 Under The Sign of Saturn도 명문장인데 롤랑 바르트 편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방금 읽다 쓰다를 왕복하며 바르트를 기리는 마지막 문장까지 읽었습니다.


In the serious business of pleasure, in the splendid play of his mind, there was always that undercurrent of pathos—now made more acute by his premature, mortifying death.

진지한 쾌락의 사업, 그의 정신의 화려한 놀이 속에는 항상 파토스의 저류가 있었는데, 이제 그의 조숙하고 비참한 죽음으로 인해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능력자만이 이 번역문을 윗 문장 수준으로 바꿀 수 있겠죠. 전 못합니다.


또 하나의 바르트에 대한 글 “Writing Itself: On Roland Barthes(글쓰기 자체: 롤랑 바르트에 관하여)”는 손택이 1982년에 쓴 A Barthes Reader의 소개글이기도 하고 매거진 The New Yorker 1982년 4월 26일판 122페이지 Refelcetion에 게재됐던 글입니다. 손택 자신의 책인 Where the Stress Falls(강조해야 할 것, 절판)와  A Susan Sontag Reader에도 실려 있습니다. 


먼저 글보다 세 배나 많은 분량이라 일단 이번 글은 여기서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님의 서명
인생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 하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써야 하고, 고통 받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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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3-11-08 10:28:19

 到處有靑山

WR
2023-11-08 10:38:02

산에 가본지 2주가 넘으니 '인생'도처유청산임에도...

2023-11-08 10:49:14

Truth is everywhere.

2
2023-11-08 11:13:49

롤랑 바르트.
이름조차 '문학적인' 비평가를
생각의 물속에 떨어뜨리면,
저에겐 '김현'이란 또다른 이름 하나가
추억의 물방울처럼 떠오릅니다.

김현은
그의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훔치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김현체'라는 문체를 남겼지요.
그러나 황지우가 말했듯,
문장이 사고의 결이라면
문체는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흔한 오해와는 달리
문체는
글이라는 문장의 육체 속에 깃들어 있는
문장의 정신이라는 것인데,
이와 같은 문장의 정신을 함축한 문체가
번역이라는 다른 언어로의 전환 과정을 거쳐서도
오롯이 보전될 것인가, 하는 문제
즉 문체가 번역을 견디는 문제에 관해서
보르헤스는 이런 시각
ㅡ 시각 속의 시각 ㅡ 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완벽한 글’과 ‘불멸의 글’이 있다.
완벽한 글은 단어 하나만 고쳐도 그 전체가 무너지는 글이어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뉘앙스가 사라진다.
반대로 불멸의 운명을 타고난 글은 오탈자 · 오역 · 오독 · 몰이해의 불길을 통과하며, 갖은 시련에도 영혼을 방기하지 않는다. 불멸의 글은 전압이 극히 높은 전류와 같아 부실한 매체를 뚫고 흐른다. 독자를 감전시키는 것은 문체가 아니라 혼이다."

보르헤스가 말한 혼.
독자를 감전시키는 혼이 바로 문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고 있죠.
달이 아닌 달을 가르키는 손을 문체라고 말이죠.
롤랑 바르트가,
김현이,
수잔 손탁이
그만의 문체를 통해 ㅡ 정신과 혼을 담은 ㅡ
불멸의 글을 썼다면,
번역이라는 전선을 통과해서도
그 끝의 독자를 감전시키리라는 것,
만일 그들의 글을 읽고도
독자가 1도 감동의 전율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은 작가의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역자의 잘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잘못을 저지른 역자는
스스로도 문학적 감전을 못 느낀 상태에서
번역을 했을 게 틀림없습니다.

불멸의 문체는
번역의 전선 끝에서
독자를 감전시킵니다.

WR
Updated at 2023-11-08 11:20:25

바르트의 원문에 대해 비슷한 글귀를 손택이 썼었는데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우울한 열정을 읽은 국내 작가들의 소감을 여기저기서 읽었고 그렇게 감전된 소감을 목격한 바 '우울한 열정'을 읽으며 번역의 전선을 넘은 예민했던 사람들이 존재함을 알고 문드래곤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1
2023-11-08 11:23:18

제가 좋아하는 (칼) 바르트와는 다른 분이군요

외국어 문장을 읽으며 의미 이상의 것을 느낄 수 있으려면 내공이 얼마나 쌓여야할까요~

1
2023-11-09 00:24:17

 긴 하루를 마치고 좀 늦게 왔는데 바르트라니.. 반갑네요.

저도 한시절 그의 글과 실험적인 텍스트들이 무척 좋았습니다.

말씀하신  사랑의 단상은 어느 지면으로 들어가 읽어도 흥미로운

연애와 사랑의 다채로운 풍경을 둘러싼 텍스트이죠. 기호학자로도

유명한 그는 사랑에 빠진 이가 대표적인 기호학의 실행자라

빗댓는데, 상대의 표정과 분위기, 답변과 나에 대한 반응을 해석하고

의미를 파악하려는 그 열망에 바르트가 주목했던 듯합니다.

기실 이 책과 현대의 신화들, S/Z, 바르트에 의한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등 정말 끊이지 않고 비평과 글쓰기의 실험을 

도모했던 그의 행적이 독특하지요.

파리 거리서차에 치고 한달여 투병하다 결국 세상을 떠났는데.

애도일기의 지면을 넘기다 보면, 어머니의 죽음으로 큰 상실과

고통을 체감한 그가 사고 뒤 삶의 의지를 내려놓지 않았나란

샹각도 들었습니다.

그가 남긴 일기에 보면 때론 라땡쿼터의 술집과 클럽을 찾으며

욕망을 체화하던 순간들의 기록도 엿보이지요.

밤의 그늘 속에 인간적이지만 결국 채울수 없는 흑역사같은..

제 기억으로도 손택의 바르트에 관한 소개의 문장과

그이가 사용한 단어들은 정제되고  찰지면서, 지적인 도도함과

포착의 힘을 보여주었다고 봅니다. 

.. 그나저나 그랬군요님의 독서열과 지적 욕구는 늘 접해도

대단하십니다.

 

WR
1
2023-11-09 00:35:20

barthes68님 말씀이 손택의 글 내용과 겹쳐서 바르트가 구체화됩니다. 사랑 타령을 하기엔 늦은 나이지만 '사랑의 단상'을 읽기에는 저에게 지금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1
2023-11-09 01:02:39

제 기억에 사랑의 단상은 번역이 꽤 유려했던 듯합니다.

책 속에서 바르트가 젊은 베르테르의ㅡ슬픔 등과 같은 

문학 작품과 연애를 둘러싼 의례와 관성을 놀랄만큼

꿰뚫어 보고,  연계해내는 서술과 진단이 좋았습니다.

감각적인 문체를 넘어 사랑한다는 것을 파고들며

백과사전식 주해와 앎을 조율된 톤으로 제시하곤 했지요. 

낭만적 사랑과 사회 같은 조금 더 딱딱하고, 그 주제를

사회학적으로 풀어낸 것 보다 더 참신하고 울림이 있었지요.

그 책을 읽던 시절에 서간체 소설과 연애의 담론도

흥미로웠고...

우리 대부분은 연애와 관련해 질풍노도에서 기다림과

상처 등의 의례를 치르는데.. 바르트의 징후적인 해석이

위안이 되기도 했었네요...

오늘 이문세씨의 옛사랑 올려주신 분이 있었는데...

그랬군요님 글 보면서, 제가 그글에 단 댓글이

묘하게 교차되기도 혰네요.

 

https://brunch.co.kr/@someonessummer/46 

WR
1
2023-11-09 01:31:31
but, sexual transactions aside, his interest in you tended to be your interest in him. (“Ah, Susan. Toujours fidèle,” were the words with which he greeted me, affectionately, when we last saw each other. I was, I am.)
하지만 성적인 거래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신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곧 당신에 대한 그의 관심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아, 수잔. 항상 행복하세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가 다정하게 저에게 인사한 말이었습니다. 그랬죠, 그랬어요.) - 바르트를 추억하며 중에서.
Always Faithful이 왜 항상 행복하세요라고 번역되는지는 인공지능만 알겠죠.  두 사람의 서로간의 글에 대한 인식과 이해와 신뢰를 함축한 문장이라고 느꼈는데요.
 
댓글 말미에 주신 링크 들어가서 한참 읽다가 왔습니다. '부재하는 이'는 영어를 대조해서 읽어봤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번역문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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