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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니얼 데닛의 "의식이라는 꿈" 재번역판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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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4-01-31 01:22:30

 1년 쯤 전에 대니얼 데닛의 책 "의식이라는 꿈"과 이 책의 주제인 심리철학에 대해 프차에 간단하게 소개를 한 적이 있습니다. 

 

https://dprime.kr/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24109358&series_page=1 

 

 심리철학은 현대의 심리학 주제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주관성과 관련이 있는 철학입니다. 우리가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의식이 어떻게 가능하고 그 실체가 무엇인지에 관한 탐구입니다. 이 주제가 중요한 것은 이 문제가 인간과 동물, 또는 인간과 인공지능 등의 차이와 공통점을 발견하고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윤리적 문제와도 결부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동물이 그저 살아있는 기계장치에 불과하다면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가 그다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없겠죠. 또 하나는 실용적으로는 덜 중요하지만 의식 문제가 그 자체로 인간에게는 해결할 가능성이 없는 가장 심오한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노벨상을 받거나 그에 준하는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이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인생 최후의 주제로 상정하고 뛰어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수리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와 DNA구조의 발견자인 프랜시스 크릭이 있죠.

 

 사실 의식에 관한 탐구는 심리학이 막 발전할 초창기에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의식에 대한 탐구가 근본적으로 주관적 경험자의 보고에 의존할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빠르게 심리학의 분야에서 배재되어왔죠. 

 

 그리고 이 문제는 철학에서도 꽤 오랜 전통을 가진 문제였습니다. 고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대한 탐구로부터 근대의 인식론, 현대의 현상학과 분석철학의 하위분야인 심리철학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철학의 중심에서 밀려나 본적이 없는 주제입니다. 특히 의식 경험자의 주관적 보고의 위상에 대한 이견이 후설과 이후 실존철학자들을 주축으로 한 현상학과, 주로 영미권에서 발전한 분석철학자들을 갈라놨습니다. 

 

 대니얼 데닛은 현상학의 주관성에 대한 독단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는 분석철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현상학적 시각을 비판하는 분석철학의 최선두 주자입니다. 현상학자들은 의식 속으로 들어온 주관적 감각경험의 대상인 감각질(qualia)이 실제로 주관적 의식과 별개로 존재하고 우리의 의식은 그렇게 우리의 감각을 통해 재구성된 감각질을 경험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대닛은 그런 감각질이란 존재하지 않고, 감각질의 존재와 감각질을 포함한 의식경험 모형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주관적 의식경험을 대상화화는대서 오는 오류라고 비판합니다. 여기서 더 자세하게 다루기는 힘들지만 대닛은 비트겐슈타인의 경험모델을 계승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트겐슈타인도 논리-철학론과 다른 심리철학에 대한 글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세계 자체이지, 나 자신의 마음을 포함하는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여러 번 피력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유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흄이 데카르트의 "나"에 대한 비판과, 흄에게 영향을 끼친것으로 추측되는 티벳불교의 의식이론까지 가 닿게 됩니다. 

 

 2년 쯤 전 이 문제를 가장 컴펙트하게 다룬 데닛의 역작 "의식이라는 꿈"이  거의 20년 만에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제가 느끼기로는 꽤 좋은 번역이었고 저 또한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주제가 주제인만큼, 또 대닛이 영어권에서도 글을 미묘하고 현란하게 쓰는 최고급 글솜씨를 가졌다고 평가받는 만큼, 책을 어렵게 느낀 독자들이 많았나봅니다. 그래서 역자였던 문규민이 글을 더 쉽게 풀어서 재번역을 시도해 책이 다시 나왔습니다. 사실 이전 번역도 뜻의 명료함을 위해, 데닛의 복잡하고 현란한 문체를 많이 희생했다고 역자가 밝힌 바라, 아마 이 번역에서는 대닛의 문체 보다는 대닛을 해설하는 학자이자 해설가로서의 문규현의 역할이 더 증대된 듯합니다. 이는 번역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닛의 글은 영어로 읽어도 어렵고, 많은 영어권 학자들도 대닛을 적잖게 오해하니까요. 

 

 아무튼 이 좋은 책이 왜 이리 빨리 절판이 되었는지 궁금하고 아쉽던 차에 재출간 소식을 들으니 반갑습니다. 저는 이미 구번역판을 충분히 읽고 잘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호기심 때문에 조만간 다시 재번역판도 읽어보게 될 것 같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지르세요!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2585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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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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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30 22:20:52

절판된 판본(2021년?)이 국회도서관에는 있더군요.

요즘 국회도서관 애용하고 있습니다.

WR
2024-01-30 22:24:25

국회도서관에서 관외 대출은 안되죠?

2024-01-30 22:28:41

그럴거에요. 아침일찍 가서 관내대출 받으면 저녁 9시 까지는 읽거나 복사할 수는 있더군요.

WR
2024-01-30 22:31:07

어차피 이 책은 초심자들이 짧게 읽고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힘든 책이라 구입해야 하는 종류의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닛은 책은 한 번도 빌려 읽은 적은 없네요.ㅎㅎ

1
2024-01-30 22:35:12

전에 입문서로 안티 레본수오의 책을 추천하셔서 읽어봤습니다.
초보자에게 맞춰 쉽게 쓴 책이더군요.
교양과목 교재로도 쓸 법한 교과서 형식이고요.
다만 한번만 읽고서는 머리에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는 게 문제네요.

WR
2024-01-30 22:36:40

언제든 이 분야에 열정이 생기시면 그 때 또 요긴하게 읽으시겠죠.

2
Updated at 2024-01-31 00:43:47

글을
쉽게 쓴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지요?

글을
어렵게 쓴다는 건
또 얼마나 쉬운 일일까요?

누군가에게 쉬운 글이
다른 누군가에게 어렵다면
그 글은
쉬운 걸까요, 어려운 걸까요?

내 눈에 안경처럼
내 의식에 들어오는 글,
그것을 의식이란 머리상자 속에서 꺼내는
그 글의 주인에게
그 글 작업은
쉬웠을까요, 어려웠을까요?

필자도 모르는 일을
독자라고 알까요?

그럼에도 의식은
무의식의 방을 두르고 있는 생각의 벽이기에
그 의식의 벽에 뚫린
글의 문을 열지 않고는
그 깊은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글의 쉽고 어려움은
글의 문이 열리는 순간,
눈의 손에 느껴지는,
글의 문이 지닌 '뻑뻑함'의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글을 읽는 안경 속의 눈알은
또 얼마나 뻑뻑한지,
뻑뻑한 눈에
인공눈물 좀 넣어야겠습니다.

WR
1
Updated at 2024-01-31 13:48:10

문드래곤님의 글을 읽고 한참 생각하다가 오늘에서야 소박한 댓글을 답니다. 다른 것은 잘 모르지만, 제 경험으로는 쉽지 않은 내용을 독자에게 쉽게 전달되는 내용을 쓰는 것은 쓰는 사람에게도 '쉽'습니다. 적어도 글을 쓰는 그 순간에는요. 더 강경하게 말하자면 '쉬워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문드래곤님의 글 말미에 '뻑뻑함' 이라는 단어에 공감을 했기 때문인데, 글쓴이가 글의 주제에 익숙해져서 자유자제로 부릴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면 이해하기 쉬운 글이 나오기 힘들고, 그런 경지라면 쓰는 것도 쉽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도 많이 문을 열고 닫아 문과 문틀이 부드럽게 서로 다듬어진 경지겠죠. 

 

 다만 그 경지에 다다르는 것은 자기가 잘 모르는 주제에 대충 여기저기서 긁어온 글을 이어붙여서 주제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게 되는 글을 쓰는 사람들보다 평소에 공부의 어려움을 더 많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니 당연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감당해내고 나면 생각을 펼쳐내는 일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죠.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쿤데라의 노벨라 "느림"에 나왔던 중국 황제와 화가 추앙추의 우화가 생각납니다 황제가 추앙추를 초빙해 게 그림을 하나 그려달라고 청하자 그는 5년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죠. 5년이 지나 황제가 그림이 다 되었느냐고 묻자 추앙추가 그자리에서 5분만에 그림을 그려줬다는 이야기요. 능숙해서 쉽게 설명하는 일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문드래곤님의 시 같은 글에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은 번다한 산문 뿐이네요. 좋은 댓글 항상 감사합니다.  

 

2
Updated at 2024-01-31 16:24:33

rockid과의 대화는
언제나 저를 즐겁게 합니다.
역시나 우문의 현답처럼,
어리석은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시는
님의 글씨에 담긴 마음씨에 탄복합니다.

독서에 있어 판단되는
글의 쉬움과 어려움 사이에
어떤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예컨대 유시민이 쓴 글의 쉬움과
슬라보예 지젝이 쓴 글의 어려움
사이에서 독자는
누구의 손도 들어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쉬운 글을 참 쉽게 느끼게 하고
어려운 글을 참 어렵게 느끼게 하는
공통적 요소 ㅡ 그러니까 참기름처럼 느끼한
'어떤' 매끄러움이
쉽고 어려운 문장과 문장 사이에
녹아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겠습니다.

글의 내용이 갖는 쉬움ㆍ어려움과 별개로
그 형식이 갖는 ㅡ 즉 문체에 있어서 ㅡ
매끄러움 때문에
독자의 눈은 글 위로 미끄러집니다.
눈길에서처럼 잘도 미끄러집니다.
그런 점에서 유시민과 슬라보예 지젝의
매끄러운 글은
독자를 쉽고 어렵게 미끄러지게 합니다.

문장이 살이라면
문체는 결일 테고,
독자는 눈의 손으로
글이라는 의미의 살결을 어루만지는 것.
그러니 느껴지는 그 글결이
쉬워서 부드럽고
어려워서 거칠다고 한들
그 느낌의 다름은
그저 공평한 다름일 뿐,
결코 좋고 나쁨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쉽고 어려운 글 사이에는
우주의 별처럼 무수히 많은
다른 질감의 글들이 존재합니다.
쉽고도 어렵고, 어렵고도 쉬운
가령 김현의 글을
오랫동안 저는 사랑해 마지않았습니다.
그가 쓴 책 ㅡ 이라는
글의 우주 속에
검게 빛나는
글자의 별들을 내려다보며
오늘도 한 자 한 자
눈으로 베껴써 봅니다.
그렇게 저는
저만의 글,
그 글의 별을 찾아서
감은 눈속에서
꿈처럼 펼쳐진
심우주(心宇宙)로 떠납니다.

독서는 눈으로 하는 여행이라 했거늘,
노안이 찾아온 눈은
장문의 독서여행을 어렵게 하니,
피곤한 다리를 쉬듯
눈을 감으면
감은 눈 속에서
글자가 떠오르고
떠오른 글자가 떠나기 전에
얼른 붙들어
메모의 방에 가두고 나서야
간신히 완성되는 한 편의 글,
그 글자의 모음을
보여주고 싶은 한 사람의 눈앞에
이렇게 펼쳐놓는 것 ㅡ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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