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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카를로 로벨리의 과학철학 - 첫 번째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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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12-11 21:23:59

 

 

아래 파블로프의 자명종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아예 좀 더 자세하게 책 소개를 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글을 새로 씁니다.  

 

  카를로 로벨리는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의 중력장이론이 모순을 조화시키기 위한 "B"프로젝트인 고리양자중력이론을 연구하는 이론물리학자입니다. 이  책 외에도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한 교양서를 많이 써서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죠. 사실 저는 과학사나 과학철학에 관련한 책을 고를 때, 현장의 개별과학 전문가의 책은 피하는 편입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들을 것이 없어서나 억지스러워서가 아니라, 대부분 당위적이고 다소 윤리적 분위기까지 풍기는 포퍼의 반증가능성의 과학철학을 예외없이 답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학이 입증과 반증의 경합을 통해서 민주적이고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을 정도의 엄밀한 과정을 통해 윤리적으로 발달한다는 고전적인 과학의 상을 만든 포퍼의 업적은 커다란 기념비이고 또 현실에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 부분이 있지만, 전문 과학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 경우, 그동안 반과학주의자들에게 공격당해 쌓인 억울함을 풀려는 의욕이 너무 앞서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과학의 사회적 부작용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전문과학자들의 경우, 인문학자들 특유의 미묘한 늬앙스를 느끼기 어려워서 읽는 맛도 좀 떨어지는 경우가 많죠. 

 

 그러나 국내에 아낙시만드로스를 따로 다룬 책은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이 책은 읽어야만 했던 책입니다. 또 카를로 로벨리는 정말 고급스럽게 글을 잘쓰고 전복적 상상력도 탁월한 학자입니다. 고리양자중력이론의 맞수인 리 스몰린이 더 인간의 선험적 직관에 충실하고 소박한 스타일이라면, 로벨리는 너무 극단적이지 않냐는 소리를 들을만큼 상상력에 한계가 없죠. 때문에 저는 이 책을 읽었습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보통 밀레토스 학파의 2인자로서, 탈레스를 계승한 자연철학자(과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최초의 철학자 칭호를 획득한 텔레스에 비해서는 콩라인을 타서 덜 알려졌죠.

그러나 아낙시만드로스는 세계최초의 업적을 여럿 남긴 대단히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철학자였습니다. 

 

 첫째, 그는 지구가 바다나 코끼리 혹은 상자같은 받침대 없이 우주 공간에 떠있다고 상상했다고 알려진 최초의 인간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물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인간의 암묵적이고 선험적 직관을 최초로 부정한 철학자였기 때문입니다. 자연철학자들을 경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도 아낙시만드로스의 이 이론의 의의를 높이 평가했으며 자신의 이론에 끼워넣어 중세 내내 위력을 발휘했던 천동설의 원시적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의 서구 천문학은 사실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에 기대어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현재까지도 그렇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공어 떠있는 지구와 천체가 자연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요.

 

 둘째, 그는 최초로 대기 작용 지진 등의 자연현상을 신을 빼놓고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시스템은 모두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것들을 설명하는데 신을 배제함으로써 현상에 대한 법칙을 찾는 과학활동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셋째, 그는 세상 만물이 시간이라는 변수에 의해 위에서 말한 법칙성의 영향력 아래서 변화한다는 주장한 최조의 학자입니다. 이 업적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후 파르메니데스나 엘레야의 제논, 사모스의 피타고라스 등의 영향을 받은 플라톤은 세계는 기하학적으로 구성되어있고 완벽하고 영구하며 변화는 환상이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여기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실 플라톤이 그렇게까지 관념론적인 주장을 한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플라톤을 후대에 계승하여 기독교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플로티노스는 확실하게 그런 주장을 했고 이것이 우리에게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중세 천년을 지배한 관념론에 맞서 세계의 변화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던 뉴턴과 라이프니츠보다 천 년 전에 아낙시만드로스(와 헤라클레이토스)가 있었던 셈입니다. 

 

 넷째, 그는 스승(탈레스)의 가르침에 도전하여 이론을 내새웠다고 최초로 기록된 사람입니다.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이전에도 다른 무수한 스승과 제자 간의 가르침과 배움의 형식이 있었지만 모두 스승의 이론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계승한 것이었습니다.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이후에도 비교주의적인 피타고라스 학파 등은 여전히 고대의 관습을 따랐으니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의 관계는 어느정도 선구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그는 세계 최초로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 물질(아르케: 원질)에 대해 눈에 보이는 물이나 흙 공기 같은 것이 아니라 아페이론(무한자)라는 것을 상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이전에 세계의 원질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과학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아이디어로 인해 가설에 가성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을 통해 많은 생산성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현대 소립자 이론은 모두 아낙시만드로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런 정도로 대단한 철학자였기 때문에, 아낙시만드로스는 플라톤아니 아리스토텔레스, 데모크리토스와 그를 계승한 후대의 에피쿠로스 학파 등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으로 연구될 가치가 충분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전문적 연구를 제외한 교양서 시장에서는 그런 책이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저는 이미 고대 서양 철학과 과학사 대한 꽤 많은 책들을 읽었기 때문에 아작시만드로스의 업적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따로 책 한 권 분량이면 더욱 세부적인 정보를 알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 가벼운 책이 아니었습니다.

 

책의 전반부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 당시의 시대상과 아낙시만드로스의 업적과 의의를 나열하고 논평하는 것에 그치지만 후반부에서는 카를로 로벨리가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과학론을 펴기 시작합니다.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과 "통약 불가능성(과학혁명 이전과 이후의 암묵적 세계상은 서로 소통될 수 없다)"을 비판하면서  사실은 모든 과학혁명은 기존의 입장을 받아들이며 그 상충되는 입장들과 실험, 관측 데이터들을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우리의 암묵적이고 선험적 가정들(예를 들면 물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자연스러운" 생각)을 교정하는 과정에서 나온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과학이 쿤의 이미지처럼 기존의 이론들과 단절된 상황에서 뚝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여기까지라면 로벨리의 주장도 제가 위에서 말한 수많은 다른 과학자들의 것들처럼 단순한 포퍼의 답습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로벨리는 여기서 한 번 더 도약합니다. 사실 이러한 쿤의 주장은 극단적인 문화상대주의적 주장이며, 문화화 문화, 개인과 개인이 서로 소통 불가능하다는 해체주의자들이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다를 바 없는 주장을 하는 것이라 설파합니다. 사실 우리는 과학의 역사에서도, 문화의 충돌에서도 늘 새로운 시각을 열고 타협하며  기존의 입장을 계승하면서 초월(포월)하는 식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기존의 지식과 새로운 증거간의 괴리에서 암묵적인 상식들을 의심하고 새로운 생각들을 창안해내는 인간의 능력이 과학을 발전시켜온 원동력이라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을 펼치기 위해 로벨리는 과학적 회의주의가 싸워온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도 고대 철학자들부터 근대의 뒤르켐, 마르크스, 현대의 제인스와 고셰의 종교발전론을 추적하면서 나름의 종교 이론을 세우는 등, 인문학자로서도 손색 없는 정교한 분석력을 보여줍니다. 정말 잘났습니다.(비아냥이 아니라 순수한 감탄)

 

 결론적으로 로벨리는 포퍼의 과학에 대한 상을 다시 한번 튼튼하게 지지하며 회의주의의 소중함을 역설하는 것으로 책을 끝맺습니다. 과학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도대체 과학의 핵심적인 작동기전이 뭔지, 그리고 종교인들과 해체주의자, 포스트모더니스트들 등, 비합리주의자들의 과학비판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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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3-12-11 20:42:48

신을 빼버리려 한 건 칸트와 같고, 시간을 중요한 변수로 선정한 건 (맥락은 좀 다르지만)아인슈타인이 생각나는군요. 사실 그리스 철학 공부할 때도 아낙시만드로스는 그냥 적당히 넘어가는 사람 하나에 불과했는데, 보니까 흥미가 꽤 크게 생기네요. 마침 e북도 있고 하니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소개 감사드립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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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1 20:55:05

전공이시니 잘 아시겠지만 자연주의 철학은 밀레토스 학파 이후에도 꾸준하게 명맥이 내려오긴 했죠. 원자론자들과 그들을 계승한 에피쿠로스도 그렇고, 사실 칸트의 인식론에서 선험적 형식을 강조한 것을 빼면 흄에게서 거의 빌려온 아이디어죠. 흄은 아마도 티벳불교의 인식론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아 아주 높고요. 아인슈타인의 시간론은 철학적으로 상당히 정교한 분석을 요하는 개념이라서 나중에 따로 말씀을 나눠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사실상 저는 아인슈타인도 철학적으로는 플라톤 취향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마 흥미로운 대화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책이 밀도가 있습니다. 특히 후반부 엄청 흥미진진해요. 즐거운 독서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1
2023-12-11 20:46:45

땅에 발을 딛고 살아 가야하는 인간(의 조상들)이 어떻게 우주공간에 떠 있는 지구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는지... 어느날 문득 그것이 정말로 궁금해 지더군요.

적어도 기록으로 남아있는 최초의 선각자가 바로 아낙시만드로스 인 것이죠? 

WR
2023-12-11 20:56:57

정답입니다 짤.

1
2023-12-11 21: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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