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VER HEALTH CHECK: OK
자동
ID/PW 찾기 회원가입

[책]  봄이 버거운 사람들에게 -『연인들』, 최승자

 
10
  850
Updated at 2024-04-24 23:16:03


 

 

 


 

 

 백 여권의 시집을 가지고 있지만 저는 여전히 시 읽기를 버거워 합니다. 언제나 시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압도당해 한숨을 쉬며 시집을 덮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특히 2000년대 이후의 시들이 언어의 형식과 의미의 괴리에서 오는 말놀이를 즐기는 쪽으로 시류가 변하자 재미를 느끼면서도 정서적 위안을 얻기가 더욱 힘들어져서 더욱 시를 읽는 것이 일종의 의무처럼 느껴지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어떤 시인들은 평생을 두고 음미하는 즐거움을 줍니다. 일제 강점기의 김광균이 그랬고, 현대 초입에서는 김수영이 그랬죠. 그 밖에도 황지우나 정호승, 신경림 같이 누구에게나 두루 사랑받았던 시인들, 또 좀 더 후대의 시인들 중에는 이수명이나 신해욱의 시들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언제나 시집을 펼칠 때마다 좋아하는 엘레지를 듣는 것 처럼 아련한 슬픔이 느껴지면서도 기대감에 설레이게 되는 시인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최승자입니다. 

 

 최승자의 시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25년 전에 한 대형 서점에서였습니다. 휴대전화기가 없었던 때(저는 남들보다 훨씬 늦게까지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지인과 약속을 하면 대형 서점에서 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인터넷 서점도 아직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서점에 들러서 흥미로운 신간이 나왔는지 확인하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었죠.  그날 따라 이 시인과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나 봅니다. 좀처럼 시집 코너에는 잘 가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흥미로운 표지의 시집 한 권이 눈에 띄었고 저는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며 관심을끄는 시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최승자의 『연인들』이었습니다. 아마 그때 저는 상당히 피곤한 연애를 하고 있었을 겁니다. 엄청 관심이 있었던 동갑내기 친구와 밀당 끝에 거의 1년 반만에 연인이 되었는데 오히려 그때 부터는 그 연인이 저를 풀어줄 생각을 안했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만났고 집에 바래다 주어야 했으며 그러느라 가뜩이나 만성피로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던 저는 점점 세상이 쟂빛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나마 그 연인도 책을 좋아했던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습니다만, 별로 소득이 없었습니다. 책을 읽고 토론이라도 하려고 하면 그걸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화를 냈으니까요. 저는 그 때,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은 어쩌면 신기루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즈음에는 융 심리학의 영향으로 신화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거기서 봤던 이야기들은 죄다 입문례나 희생제의처럼, 모듬살이를 위해 겪어야 하는 개인적 고통의 숙명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가족들과도 오래 시간을 보내는 것을 힘들어하는 극도로 내향적이고 은둔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으니 그때의 배움과 인간관계 때문에 과연 삶이 살만한 것인지 점점 더 회의가 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집은 그런 제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세상이 원래 그런거라고, 절망적인 포즈로 저를 위로했습니다. 그런 굳은 얼굴로 옮조리는 시들이 영혼없이 밝은 표정으로 내용없는 위로를 전하는 것 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저는 연인을 만나기 전에 서둘러 시집을 사고 연인에게 그 시집을 숨겼습니다. 

 

 

 나중에 최승자 시인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알고보니 이미 제가 가지고 있었던 청하판 니체 전집의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번역자였더군요. 독어독문학과를 나와 독일 문학에 정통하고 또 그때즈음 제가 평생의 길잡이를 만난 것 같은 감정을 느꼈던 칼 융에 심취한 시인이라는 것에 묘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그 시인도 저처럼 봄을 버거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득한 봄날

통과해야만 할 아득한 봄날의 시간이
저 밖에서 선혈처럼 낭자하다.
베란다 앞 낮은 산을 뒤덮으며
패혈증처럼 숨가쁘게
어질어질 피어오르는 진달래.
눈물이 나 더는 못보고
쪽문을 소리내어 꽝 닫는다.

어떻게 견디야 할지.
내 앞에 펼쳐질
봄 꽃, 여름 잎
가을 단풍, 겨울 눈꽃

닫혀버린 집안 한구석에서
인조 장미 몇 송이가
무게도 없이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저에게 봄이란 남들과 큰 정서적 거리를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정신을 번쩍 들게하는 찬공기가 물러가고 온갖 꽃들이 피어나며 감당할 수 없는 색채로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마치 의미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시와 꼭 닮았습니다. 그리고 원래 세상이란 그렇게 봄과 같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밀려오면 저는 쉽게 피로해집니다. 저는 평생 자발적으로 봄나들이나 봄 산행을 해본적이 없습니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은 "군함의 회색과 밤의 암청색이라고 했을 때, 크게 동질감을 느꼈던 것도 그런이유였습니다. 꽃들의 화려한 색이 비명처럼 느껴지고 거기서 혼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을 저는 청소년 때부터 느껴왔죠. 어쩌면 평생 가벼운 우을증 같은 것을 느끼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덕분에 저는 크게 위험한 우울증이나 정신적 위기를 느껴본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ㅎㅎ

 

이 시도 좋지만 제가 이 시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는 다음 작품입니다.

 

 

바오로 흑염소

 

 

 

  문학동네로 올라가는 명륜동 도로변에 바오로 흑염소 사당 하나 숨은 듯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 사당 앞 거리에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 검은 흑염소 한 마리의 울음이 낮게, 아주 낮게 깔려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몇 날인가 계속 불타는 아궁이 위 항아리 속에 담겨진 채 불타다 불타다 물로 변해버리는, 비명을 지르다 지르다 침묵으로 변해버리는 그 물– 침묵의 울음소리. 몇 날 며칠을 불에 태워져야 순하디순한 물, 흑염소탕으로 변하는 흑염소의 에고(ego). 그 아궁이 불을 보살피는 사람이 연금술사인가, 그 항아리 안에 든 흑염소, 혹은 흑염소의 혼, 혹은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 자신이 자신이 연금술사인가, 아니면 그 거리를 지나면서, 낮게 깔린 자욱한 안개 같은 그 검은 울음소리의 그물에 매번 발목이 사로잡히는 내 자신이 연금술사인가.

 

   저 20세기의 상점으로 변해버린 바오로 흑염소 사당. 저 몇천 년 전의, 저 이방의 상징이 아직도 살아 “내 영혼의 어두운 밤”을 증거한다.

 

 

 

상징이란 지독하게 살아낸, 살아 달이고 우려낸 삶의 이미지이다. 살아내지 않은 것은 상징이 될 수 없다. 

 

 

삶이란 결국 끔찍한 일상처럼 심상한 것이라 더 절망적이고, 시는 그런 삶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모두 종말을 앞두고 즐기는 축제 같은 것처럼 비겁해지기 일쑤입니다. 시인에게 삶과 시란 바로 바오로 흑염소 진액 같은 것이고, 결국 시인은 얼마 안가 정신분열증-지금 말로는 조현병이지만 어쩐지 그 파탄적 성격이 잘 드러나지 않아 이 시인에게 만큼은 그가 앓았던 것이 정신분열증이었다고 끝까지 레테르를 붙이고 싶은 -을 앓았고 한동안 시와 번역을 전혀 하지 못하고 궁핍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시는 너무 값이 싸고, 시인은 밥을 먹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시는 늘 봄처럼 한꺼번에 꽃처럼 몰려옵니다. 아마도 최승자 시인은 그래서 정신분열증을 앓았을 겁니다. 정신분열증의 위험성을 지속적으로 경고했던 융을 공부하면서 정신분열증을 경험했던 시인이라니. 존경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 시집을 한동안 계속 끼고 다니다가 잃어버렸습니다. 그때는 책을 많이도 잃어버렸죠. 지갑도 자주 잃어버렸고요. 그르니에의 책들을 특히 많이 잃어버려서 새로 사곤 했습니다. 이 시집도 언젠간 사야지 사야지 하다가 결국 절판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문학동네에서 복간판을 내고나서야 다시 시집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시를 읽지 않았지만,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시에 끌리게된 독자가 있다면, 제가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시집은 바로 최승자의 이 작품집입니다. 

 


 

 

 

 

 

7
Comments
1
Updated at 2024-04-25 09:15:47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서른이 영원히 안올 것만 같았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제가 이렇게나 오래 살았네요
침묵의 세계 속에서도 아득한 봄날을 계속 마주하며 살았을 시인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언제나 제 마음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 시인입니다

WR
1
2024-04-25 00:28:17

맞아요 침묵의 세계도 번역하셨죠. 저도 그렇습니다. 최소한 90년대 시인들 중에서는 가장 사랑하는 시인입니다. 최근까지도 요양병원 계시다가 퇴원하셨다네요.

1
2024-04-25 05:10:29

최승자시인이 얼마전까지 포항의료원 정신병동에 계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WR
Updated at 2024-04-25 12:47:21

그렇군요. 저는 요양병원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분열증도 아직 완쾌되신 건 아닌가 봅니다. 

1
2024-04-25 12:46:21

연고가 있나 싶었는데, 외삼촌이 계셨던 모양입니다. 잠깐잠깐 병원밖 포항시내 나들이를 한 소회를 밝히는 작품이 몇 있었고 시집이 나왔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납니다. 시인 스스로 '과잉된 정신'을 말하던데, 봄을 앓고나서 나른한 마음을 잘 추스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밖에요.

1
2024-04-25 07:09:22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처럼 평생 가까이하는 책이 한 권이라도 있다면 성공이라 하겠습니다.
저에게는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이 그런 책입니다.
힘들고 괴로울 때 위로를 받아요.

WR
2024-04-25 12:13:53

생활의 발견도 좋은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는 책이죠. 

 
글쓰기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