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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불평등하고 쇠락한 문명 속에서 살아가기- 『만조의 바다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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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12-05 10:00:52

 

 

 

  최근 이창래의 신작소설 『타국에서의 일 년』이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이창래는 재미교포 2세 소설가로, 미국 문단에서 가장 촉망받는 작가군에 속한 인물입니다. 미국 문단에서 장르소설이 아닌 주류문학 분야에서 마이너 집단 출신 작가가 살아남는 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이창래를 비롯해, 돈 리, 알랙산더 지, 수잔 최, 그리고 이들보다 다소 문학성 측면에서 부족하다는 평가를 듣는 『파칭코』의 이민진 작가 마져도, 거의 아이비리그나 대학 랭킹 상위권의 주립대학 출신에, 한국인 이민자 특유의 완벽주의를 더해, 문학과 출신이 아닌 경우는 문예창작 과정을 별도로 이수하고 글쓰기에 뛰어듭니다. 오늘 소개하는 작가 이창래만 하더라도 예일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오리건 대학에서 문예창작 석사를 이수했습니다.  

 

 이쯤되면 충분히 주류 의식을 가지고 주류문단의 관심사나, 주류문단 특유의 형식적 실험에 치중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계 소설가들의 태도는 좀 다릅니다. 이들은 오히려 전통적 스토리라인과 고급스러우면서도 안정된 문장, 그리고 대중지향적-이것이 브루주아 문화로서 시작된 유럽소설의 전통과 다른 점-이라는 미국적 소설 전통을 충실히 따르며, 일관되게 마이너리티의 정체성을 중심주제로 다룹니다. 한중일이 여기서는 치열하게 경쟁도 하고 반목도 하지만, 미국땅에서야 다 기타등등, 쩌리에 불과하겠죠. 그래서 그런지 이들의 마이너리티에 대한 관심은 특정한 민족 테두리에 머물지만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돈 리의 작품에서는 일본인이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하고, 일제강점기 시대를 다루는 이민진의 작품에서도 주인공에 필적하는 일본인들이 등장하죠. 알랙산더 지의 경우는 더 치열합니다. 그는 에스닉 마이너리티의 한계에 더해 LGTB의 정체성을 가진 작가로 그의 작품 주제는 언제나 자신의 비주류 정체성입니다.  

 

 이창래의 가족은 미국 뉴욕의 퀸즈 지역에 막 동아시아인 이주자들 밀려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인 1960년대에 이민해서 자수성가했지만 그 와중에 겪은 은근한 차별의 상처는, 자수성가한 1세대,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주류사회에 편입한 부유한 중산층 2세대라는 거의 표준적이라 할 수 있는 테크트리를 탔는데도 불구하고 지워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반 세기 전이니 아마 지금보다 정도가 더 심했겠죠. 이창래는 지금까지 꾸준히, 미국에서 생존하기 위해 분투하는 동아시아인 교민사회의 모습을 그려왔습니다.  이창래는 한때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등, 미국 주류문단에서도 탑클라스 대접을 받는 촉망받는 작가였고, 그 문명으로 인해 프린스턴과 스탠포드 같은 명문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강의하기도 했지만 30년이 넘는 작가 생활 동안 쓴 작품은 겨우 6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중 4편의 작품을 읽어봤는데,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대체로 일정 수준 이상의 질을 담보하고, 특히 『척 하는 삶』과 본작 『만조의 바다 위에서』는 그야말로 소설에서 눈을 때기 힘들 정도의 재미와 작품성을 보여줍니다. 사실 제가 생각하는 이창래의 최고의 작품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인 군의관의 비밀스러운 삶을 다룬  『척 하는 삶(Gesture's Life)』이지만,  본작, 『만조의 바다 위에서』의 재미와 작품성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특히 이창래가 시도한 첫 번째 SF소설(혹은 미래 소설)로, 앞으로 환경오염과 자원고갈로 변화된 미래 사회에서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창래의 장점은 주류문학에 발을 걸쳤으면서도 장르소설적 기법에 능숙하고, 그러면서도 미국문단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을 만한 주제의식을 담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의 데뷔작이었던  『영원한 이방인(Native Speaker)』는 스파이 소설의 분위기를 띄고 있고,  『가족(Aloft)』은 체홉식 가족드라마에 멜로적 요소를 도입했습니다. 게다가 신비하고 매력적이고 도덕적인 주인공들 등, 폴 오스터 등, 이미 성공한 주류문단 작가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공통된 특징들을 고루 갖추고 있죠. 그러나 사실 저는 그러한 엇비슷함이 이창래의 한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데뷔 작품을 읽었을 때, 평단과 대중적으로 모두 성공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비슷한 배경의 작가인 돈 리처럼, 마이너리티 정체성을 빼고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다른 엇비슷한 수준의 미국작가들과 구별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창래는 그만그만한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척 하는 삶』에서 한일간의 어두운 역사와 전쟁범죄를 핍진하게 다루는 그의 솜씨는 대하소설적인 작품 기법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감히 존 스타인 벡의  『에덴의 동쪽』에 필적할 만한 역사적 시야와 카타르시스를 전달했던 작품으로기억합니다.  본작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작의 무대는 먼 미래의 볼티모어 근교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는 환경오염과 지구 온난화, 자원 고갈로 성장동력을 읽고 조금씩 쇠퇴해가는 사회입니다. 미국이든 다른 나라든 가릴 것 없이, 부유한 사람들은 '차터'라는 쾌적한 생활 공간에서 폐쇄적인 사회를 이루고 삽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층민들은 드문드문 흩어져있는 슬럼가에서 비위생적이고 폭력적이며 궁핍한 삶을 영위해 나가죠. 그러나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차터는 모든 것이 풍족한 사회이긴 하지만 생활을 위한 산업 기반이 부족해서 그들의 삶을 부양할 수 있도록, 특화된 산업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수 많은 산업지대들과 계약을 맺고 물품을 공급받고 비용을 지불합니다.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원래 미국에서 살았넌 원주민들이 아니라 중국 등지에서 터전을 잃고 집단으로 이주한 이민자들입니다. 그 산업지대 사람들은 그렇게 번 돈으로 또 다른 산업지대들과의 상업교류를 통해 삶을 영위하죠. 차터만은 못해도 안정적이고 깨끗한 삶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도 깊은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습니다.원래 공동체중심의 사회였던 덕택에 잘 구비되었던 사회보장은 점점 강팍해지는 삶의 조건 속에서 나날이 줄어들어, 노인들이나 환자들의 삶의 포기가 은근히 미덕으로 간주되고 있고, 모든 사회구조가 생산에 맞춰져 있어서 비생산적인 관심사는 뒤로 밀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답답한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뛰어난 운동선수나 연예인이 되거나, 거의 천재적인 학업실력을 인정받아 차터로 편입하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들은 자식들이 이렇게 되길 바라지만 일단 차터로 편입된 사람들은 산업지대 사람들과의 인연이 끊어지고 그들의 이야기는 신화로 남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미래를 다루고 있지만 현실과 묘하게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아마도 이창래는 취업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더 첨예하게 계급이 갈라진 미래 사회라는 시공간에서 선명하게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요즘 우리 사회도 별다르지 않죠. 미래 동력은 점점 고갈되고 있고, 나쁜 일자리를 체우기 위해서 대규모로 노동력을 수입하는 사회가 되었죠. 고급 아파트들은 불법으로 길을 막고 벽으로 둘러싸 점점 폐쇠적인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있고요. 이창래는 이런 추세가 더욱 가속화되고 선명해진 미래 사회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이 모든 곳을 경계를 허물며 횡단하는 한 어린 여자아이의 시선으로요. 이 점에서 이 작품은 바리데기에서 심청전으로 이어지는 한국 고유의 민담과 연결점이 있습니다. 사실 이 소설을 읽고 가장 먼저 뇌리에 떠오른 작품은 황석영의  『심청: 연꽃의 길』과 『바리데기』였습니다. 이창래의 소설은 이렇게 하나의 작중상황이 좁게는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상황에서부터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깊고 넓은 작품세계를 보여 줍니다. 그는 이민자 사회의 특징에서 전세계의 보편적 징후를 읽어냈던 것입니다. 

 

 이 소설은 발간된지 8년 남짓 지났지만 이미 절판이되었습니다. 그나마 이창래는 한국에서도 명성이 널리 퍼진 작가라서 연세대 석좌교수도 하고 있고, 복간도 가끔 되는 편이죠. 아마 이 작품도 언젠가는 복간이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읽어보고 싶은 분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아직 중고책들이 많이 거래되고 있어서 구하기 어려운 편은 아닙니다. 이 쓸쓸한 퇴보의 시대를 어떻게 건너가야 할지 고민되시는 분들에게는 아마 좋은 읽을거리, 좋은 생각거리가 될 책일 것 같습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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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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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5 01:36:02

좋은 책들은 지금도 여전히 도처에 감추어져 있었군요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꼭 읽어보고 싶은 작가와 작품인 것 같습니다

WR
2023-12-05 08:30:00

적어도 이창래의 척 하는 삶과 이 작품은 꼭 읽어볼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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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5 03:04:41

록키드님의 책 소개 기념으로 책이 재발간됐나봅니다 사러 가야겠어요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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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12-05 08:31:55

오, 진짜네요.ㅎㅎ 며칠 전가지만 해도 죄다 품절상태여서 절판이겠거니 했는데 일부 작품은 신작 출간에 앞서 중쇄를 했나보군요. 책 재밌습니다. 초반의 설정이해와 번역이 약간 산만하긴 한데, 한 50페이지 정도 넘어가면서부터는 죽죽 속도가 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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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5 09:05:33

한국계 미국 작가의 SF라니 흥미가 생기네요.

소개하신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찾아보겠습니다.

WR
2023-12-05 09:32:04

그래도 이창래의 본령은 주류 문학 쪽이라 장르소설로서의 SF와는 꽤 차이가 있습니다. 1984나 훌륭한 신세계 정도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2023-12-05 09:37:08

아, 그런 스타일의 작품이군요.

제가 즐겨보는 종류의 SF는 아니지만 그래도 읽어보겠습니다.

1
2023-12-05 13:56:14

 나중에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내용이네요.. 인도나 이런 데를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기도 하구요. 다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읽어보겠습니다.

WR
2023-12-05 17:19:15

사실 어느 정도 닥쳐온 미래라서, 저는 이 책을 읽고 이창래의 예민함에 좀 놀라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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