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오랜 친구 속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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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범우사 윤형두 회장의 부고 소식을 듣고 범우사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저는 범우사와 함께 인문학 독서를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학생 때, 친구의 소개로 읽게 되었던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개인적으로 저는 이 책의 이름이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소유냐, 삶이냐"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제 독서의 방형에 큰 영향을 끼쳤던 켈빈 홀의 "융 심리학 입문"등 범우사의 책들은 당시 중고교생이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초급교양서의 보고였습니다. 나중에 이 빚을 읽지 않고 범우사의 창립 30주년 기념 출판작인 "세계의 문자"를 일부러 구매하기도 했습니다. 1996년에 나오고 저는 21세기 초입에 구매했지만 당시로서도 책값으로는 만만찮은 7만원 짜리 책이었죠. 이외에도 제게 독일 문학의 깊이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해주었던 하인리히 뵐의 작품, "아담, 너는 어디 있었느냐",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등이 특히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1990년대 부터 범우사의 책들은 더 세련된 디자인, 더 좋은 번역, 더 신선한 필자들에 밀려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부터는 거의 범우사 책을 살 일이 없었습니다.
1.
범우사의 책을 추억의 책 코너에 소개하기로 하고 어떤 책들을 골라야 하는지잠깐 고민을 했습니다. 영국의 유서 깊은 For Beginers 시리즈를 무단으로 해적 출판한 교양만화 시리즈를 고를까, 아니면 헤르만 헤세를 처음 읽었던 사르비아문고를 고를까, 아니면 앞에 소개한 책들이 포함된 범우신서 시리즈를 고를까. 그러다 뭐니뭐니해도 범우사는 범우문고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생각해보면 범우사의 다른 책을 사지 않더라도 범우 문고는 좋은 고전들을 아주 값싸게 구할 수 있다는 이유로 21세기 이후에도 간간히 구하곤 했습니다. 제 첫 범우문고는 중학생 때 구입한 "공산당 선언"이었습니다. 노태우가 집권하고 군사정권의 살기가 한 풀 꺾인 시기이긴 했지만, 공산주의는 당시 중학생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두려운 그 무엇이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이미지는 뭔가 이론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북한"과 빨갱이라는 비극적 역사의 원흉으로서의 이미지였죠. 그러나 저는 태생이 좀 엇나가는 삐딱이었나봅니다. 아니면 하지 말라는 것에 더 호기심을 가지는 위험한 아이였거나요. 초등학생 때 부터 우연히 삐라를 주으면 신고하는 대신 간직하고 따로 책갈피 속에 모아 두었고, 어학 공부를 하라고 부모님이 사주신 라디오 겸용 카세트 플레이어의 AM에 북한의 방송 두 개가 잡히는 것을 알아채고 학교가 파해 집에 돌아오면 문을 걸어 잠그고 그 방송들을 번갈이 듣기 일쑤였습니다. 아직도 제 보관용 상자 한켠에는 삐라로 날아온 마이크로판형의 김일성 교시집, "시대의 등불"이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가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된 것은 만화들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저작권 협약 이전에 발행된 책들이 시중에 간간히 남아있을 때였는데, 범우사의 책들도 대부분 저작권 협의가 필요 없는 고전이나 아니면 해적판 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영국에는 앞서 말한 For Beginers시리즈라는 유명한 시리즈가 있는데, 나중에는 이두 아이콘 총서나 김영사의 하룻밤의 여행 시리즈로 제대로 번역된 책들입니다. 그 해적판 책들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삶에 대한 책을 범우사에서 출간했던 것입니다. 저는 동네 서점에서 그 책들이 눈에 띄자마자 서둘러 사서 집에 돌아와 읽었습니다. 레닌 소평전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지만, 자본론 해설은 그야말로 눈이 새롭게 떠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고정자본과 가변자본의 합과 자유시장에서의 경쟁으로 노동자의 점진적인 반곤화의 진행을 설명하는 부분은 이전에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그 선명성과 설명력의 궤가 다른 것이었죠.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마음 속으로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 친척 중에는 프랑스로 귀화한 숙부와 프랑스인으로 자란 사촌들이 있는데, 그 사촌은 드물게 만날 때마다 아직도 저를 놀립니다. "그래, 너는 아직도 레드인가? 우디 엘런의 영화는 어떻게 생각해?(돈을 갖고 튀어라의 한 장면을 가지고 하는 농담ㅎㅎ)" 나중에는 프랑스인 여자 친구에게도 저를 14세 때부터 공산주의자였던 친구라고 소개하더군요. 따라서 범우사는 당시의 저에게 고루한 고전을 출판하는 회사가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접할 수 있는 가장 혁신적인 창구였습니다.
2.
대학에 다니던 시절, 서양학과 친구들과 가끔 어울렸습니다. 제가 속한 영화 동아리에 서양학과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 외에도 서양학과 친구들과 친한 같은과 동기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S 누나를 소개받은 적이 있는데 굉장히 미인이었습니다. 안면을 트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곤하다, 어느 날 혼자 있는 걸 보고 시간 비면 커피 한 잔 하자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 이후로 가끔 마주치면 누나가 커피를 사주곤 했는데, 시간을 보내며 말이 끊길 때마다 메모지에 간단한 초상화를 그려서 주곤 했습니다. 저는 그때도 활자 중독자였기 때문에, 늘 가벼운 차림새로 걸을 때도 문고판 한 권 정도는 가지고 다니며 읽었습니다. 물론 가방 안에는 교제 외에도 항상 다른 읽을 거리를 챙겨가지고 다녔죠. 저는 S가 그려주는 초상화들을 늘 그때그때 읽고 있던 책 속에 끼워 넣고 잊었습니다. 아마 버리거나 판 책들에 끼워져 그대로 잃어버린 것들도 있을 거고, 잘 찾아보면 몇 장은 남아 있을 것 같지만, 일부러 찾기에는 볏짚 속에서 바늘 찾기겠죠. 이 스케치도 오늘 소개할 책을 고르다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저 베르코르의 책은 나중에 열린책들 세계문학에서 다시 소개할 때까지 범우사에서 나온 책들이 유일한 번역판본이었습니다. 소설가 신상웅이 번역한 이 책은 2차세계 대전 당시 점령지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들을 주고 그리고 있는 단편 선집인데, 표제작이 의미도 의미였지만 정말 재미있어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3.
21세기가 들어서도 저는 곧잘 범우사 책들을 샀습니다. 쉬면서 뭔가 가벼운 읽을 거리가 필요할 때, 한국 근대 소설이나 수필은 훌륭한 선택지입니다. 이태준의 무서록을 범우사 문고본으로 처음 읽었고(나중에 생략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따로 재구매 했습니다.) 거기서 알게 된 김용준의 근원수필도 범우문고로 읽었습니다. 사진의 복덕방은 이태준의 단편소설집으로 역시 즐겁게 읽었을 것이입니다. 비록 내용은 표제작인 '복덕방'과 '가마귀'를 제외하고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범우사의 회장이셨던 고 윤형두 님은 출판사를 새워서 금지되었던 불온한 책들을 대중들에게 공급했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도 사회변혁을 위해 젊은 날을 바친 훌륭한 분입니다. 단 돈 천 원에 문고판 한 권씩을 사모으던 중학생 시절, 그리고 간간히 만나는 오랜 친구가 된 모두의 친구(汎友)를 추억하면서 윤형두 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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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단숨에 읽었습니다!!
범우와 록키드님의 인연이 깊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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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막짤은 누구의 친구도 아닌 듯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