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악당이 쓴 물리학 책(오펜하이머)
『물리 속의 물리』
에드워드 텔러, 웬디 텔러(딸), 윌슨 텔리(텔러 아니고 텔리, 가족 아님). 차동우 역, 전파과학사
대중적으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면 꼭 비난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도시의 불법적 수호자인 배트맨이자 향락에 절여진 재벌 상속자 브루스 웨인은 하비 덴트가 투페이스가 되서 벌인 악행과 그에 대한 살해혐의까지 뒤집어쓰고 악당으로 남았습니다. 덕분에 고담 시민들은 순교자 하비 덴트를 기리면서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죠.
놀란의 최근작인 『오펜하이머』에서는 오펜하이머의 카운터파트라고 할만한 악당 두 명이 등장합니다. 그 하나는 영화의 공동주연이라 할 만큼 비중이 높고, 로버트 다우니Jr.의 신들린 연기로 관객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루이스 스트라우스고, 또 하나는 영화에서 맨하튼 계획 내내 오펜하이머에게 협력하기보다는 자기가 관심있는 수소폭탄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나중에 오펜하이머에 대한 보안청문회에서 그에게 불리한 발언으로 결과적으로 스트라우스를 도와 오펜하이머에게 모욕을 주고, 로스앨러모스와 다른 핵개발 프로그램의 리더 역할을 맡게 된 것으로 그려진 에드워드 텔러였습니다. 그는 결국 오펜하이머나 아인슈타인, 보어 등, 과학의 역할과 세계의 존속을 진지하게 걱정하던 다른 물리학자들이 모두 반대한 수소폭탄 개발 책임자가 되어 수소폭탄 개발을 성공시키고 미-소 핵경쟁 가속에 불을 붙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텔러는 대중문화의 클리셰 중 하나인 미치광이 과학자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스텐리 큐브릭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의 타이틀 롤인 닥터 스트레인지 캐릭터의 일부는 (폰 브라운, 폰 노이만과 함께)이 사람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닥터 스트레인지
영화 『오펜하이머』의 에드워드 텔러(베니 사프티 분)
그러나 과연 영화 오펜하이머와 그 원작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텔러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린 것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메리칸프로메테우스 만큼이나 맨하튼 계획 막전막후를 치밀하게 그린 리처드 로즈의 논픽션 『원자폭탄 만들기』에서는 로스 앨러모스 시절 텔러의 모습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다릅니다. 텔러는 오펜하이머를 상당히 존경했고, 오펜하이머 또한 텔러의 천재성을 알았기 때문에 둘은 프로젝트 종료 직전까지 상당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텔러가 당시 수소폭탄의 이론적 가능성을 깨닫고 그 연구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 묘사된 것과는 다르게, 우선적으로 오펜하이머가 요청한 계산작업들을 충실하게 수행했고, 오펜하이머는 그 보답으로 텔러를 만족시키기 위해 1주일에 한 번 씩 텔러와 개인면담 시간을 갖고, 텔러에게 수소폭탄 연구 시간을 보장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텔러는 원자폭탄 투하 직후에 원폭개발에 회의를 느끼고 잠시나마 오펜하이머의 반핵 입장에 동조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는 결국 수소폭탄 개발에 열을 올리긴 했지만 평전이나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파괴적 무기개발에 미친 사이코패스는 아니었던 겁니다.
그럼 텔러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간단하게 말하면 텔러는 헝가리 출신으로 미국에 귀화한 천재 물리학자였습니다. 말하기에는 간단해보이지만 사정을 알고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당시 헝가리는 수학과 물리학 음악 분야에서 천재들이 넘치는 나라였습니다. 쿠르트 괴델, 존 폰 노이만 같은 수학자들, 유진 위그너, 실라르트 레오 (앞의 4명은 모두 영화 오펜하이머에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코다이, 벨러, 도흐나니, 리게티 같은 20세기 음악의 가장 중요한 별들이 모조리 헝가리 출신(그리고 많은 수가 아슈케나짐 유태인)이었습니다. 미국의 수학, 물리학계와 클래식 음악계에 헝가리 출신들이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 합니다. 20세기 중엽가지 미국의 주요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절대다수가 헝가리 출신이었고, 오펜하이머가 유럽으로 유학해 양자역학을 배워와 미국에 뿌리를 내리게 하기 전까지, 미국에서는 아예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습니다.(사실 오펜하이머도 아버지가 독일 출신 유태인으로 위 헝가리 학자들과 문화적 배경을 공유합니다.) 미국이 진정한 의미에서 토종 스타 양자역학 이론물리학자를 가지게 된 것은 리처드 파인만이 세계적 명성을 획득하고 난 이후입니다.(이 또한 음악계 사정과 시슷했는데, 미국이 진정한 의미에서 미국에서 교육받은 거장 지휘자를 가지게 된 것은 레너드 번스타인이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던 때였습니다. 공교롭게도 파인만과 번스타인 모두 가계의 기원이 동유럽 아슈케나짐 출신이죠.)
간단하게 말하면 텔러는 미국이 현대 수학과 물리학을 선도하도록 기여한 유럽출신 대부들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오펜하이머, 파인만, 번스타인이 진정한 미국의 물리학과 음악분야의 대표자로 추앙되는 동안 이 중부유럽 출신 천재들은 소소한 관심과 미국의 풍요로움이 주는 안정된 생활에 만족하면서 각자의 분야에서 많은 기여를 해왔습니다. 다만 미국인들이 그들의 영웅들에 대한 영웅서사를 만들 때는 가끔 악역 역할도 해줘야 했겠죠. 사실 텔러에게 악당 이미지를 덧씌우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수소폭탄 개발도, 나름대로 변명거리가 있습니다. 당시 소련은 미국에서 유출된 핵개발 프로그램 정보를 기반으로 놀라운 속도로 미국을 따라오고 있었으며, 수소폭탄의 개발도 시간문제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폭개발로 사회적지위와 유명세를 차지했던 1세대 개발자들이 돌연 수폭개발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텔러에게 사다리 치우기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런 중요한 문제들에 그런 개인적 출세욕망 문제를 앞세우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지만요. 텔러는 오펜하이머를 위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만년의 텔러
오늘 소개하는 책, 『물리 속의 물리』는 이런 텔러가 직접 대중들을 위해 쓴, 물리 교양서입니다. 놀랍게도 이 책은 1991년에 미국에서 출간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좋은 책을 직접 소개 번역하기로 유명한 물리학박사 차동우의 빠른 번역으로 1994년에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현대물리 교양서인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보다도 몇 년 더 늦게 출간된 '최신'이었던 겁니다. 사실, 대중물리 교양서라고는 했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앞으로 물리학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은 고등학생이나, 대학에서 교양물리학을 수강할 준비가 된 학생 수준에 맞춰져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은 『시간의 역사』를 출간하면서, 편집자에게 수식이 한 번 등장할 때마다 독자가 반으로 준다는 충고를 듣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수식(E=MC^2)만을 남기고 모두 말로 때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텔러는 아랑곳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각종 수식을 제시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은 말 할것도 없고, 뉴턴의 공식들, 그리고 멕스웰 방정식, 플랑크, 보어,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의 수식모형이나 방정식을 모두 거침 없이 꺼내놓습니다.
텔러의 책이 출간되기 4년전에 나온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이 두 책은 많은 면에서 비교된다. 둘다 물리학의 역사를 간단하게 다루지만, 호킹의 책은 일종의 공약집에 가깝고, 텔러의 책은 사건백서에 가깝다. 호킹의 책은 꿈을 꾸게 하지만 텔러의 책은 훨씬 구체적으로 물리학을 이해하도록 해준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겁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텔러는 이러한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각종 수학 법칙과 이론들도, 독자가 아예 이쪽에 무지하다고 가정하고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특수상대성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피타고라스의 정리, 직교좌표계 해석등과 같은 중학교 수준의 수학을 설명하면서 나아가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지나치게 안심할 수도 없습니다. 텔러는 이러한 이론들을 간단하게 함축적으로 단 한 번만 설명하고 넘어갑니다. 미리 이런 이론들을 알고 있는 독자들은 기초부터 간단한 수식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복잡한 이론을 구성하는지를 감상하면서 따라갈 수 있겠지만, 평범한 독자들은 이해되지 않는 설명부분을 몇 번씩 되풀이해 읽으면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론적으로는 다른 책을 읽지 않아도 이 책만으로 그런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긴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현실과 이상의 괴리겠죠.ㅎㅎ
그러나 어느 정도 물리에 익숙하고, 책을 쫓아올 수 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많은 결실을 가져다 줍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통계열역학의 기초를 배울 수 있었는데, 이러한 독서 경험 때문에, 물리학이 어떻게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결론을 이끌어내는지, 그리고 고전 역학에서 양자역학과 같은 현대물리학에 이르게 된 필연성이 있는지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저는 볼츠만과 맥스웰이 왜 아인슈타인이나 보어,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물리학자들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위대한 업적을 이뤘는지 훨씬 늦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물리교양서지, 물리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으로 교과서를 보면서 관련 문제를 적어도 수 십 개씩 풀어보는 학습이 필요하겠죠. )
또 이 책은 텔러가 물리학 자체 뿐 아니라 물리학이 발전해온 역사에 대해서도 얼마나 해박한지를 알 수 있고, 또 설득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텔러는 케플러가 갈릴레오보다 훨씬 중요한 천체물리학자였다고 주장하는데, 거기에는 텔러 자신이 실험보다는 이미 알려진 시실들을 조합해서 이론을 내놓는 이론물리학자였던 이유를 추측해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책은 제가 읽어본 물리 교양서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엄격하고 그만큼 많은 것을 얻게 해준 소중한 책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텔러의 '나쁜 짓'을 들었다고 해도, 그 이면의 다른 사정들을 살펴볼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의 원제는 『Conversations on the Dark Secrets of Physics(물리학의 이면적 비밀에 대한 대화)』입니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표면적으로 알려진 인간의 이미지 뒤에는 우리가 미쳐 몰랐던 복잡한 진실이 있다는 것이죠. 텔러의 이 책은 그 규칙이 비단 인간 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리고 그런 대상을 연구하는 학문의 역사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 꼭 한 번 더 이 책을 다시 읽을 생각입니다.
아쉽게도 이 책은 현재 절판중이지만, 중고책으로 비교적 싼 값에 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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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펜하이머도 아직 안보고 저 분야를 잘 몰라서...
하지만 닥터스트레인지 러브의 캐릭터의 모델들은 있다고 생각해서... 궁금했는데... 텔러가 있었군요....
그런데. 오펜하이머에서 저런 안경을 씌운 이유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를 연상시키기 위한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