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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홍세화 별세, 남민전과 이재문과 고문기술자 이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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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4-04-18 23:11:35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37164.html

 

베스트셀러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로 유명하며 한겨레신문의 좋은 기고문들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초대 편집장이었던 홍세화가 오늘 7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역시 똘레랑스 개념을 국내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진보의 저변을 넓혔다는 것입니다. 똘레랑스, 즉 관용 정신은 우리 사회가 소수자를 위한 급진적 이념의 수용과 검토를 위해, 그리고 그 자체가 소수자들, 소수 권력의 모임이었던 진보 진영을 위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똘레랑스라는 이름으로 가시화되기 전에는 길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그 단어의 정착과 활용이란 점에서 홍세화의 역할은 혁혁했습니다. 

 

그러나 진보 정권이 들어서고 진보가 권력을 갖게 되면서 홍세화가 말했던 똘레랑스의 수용과 활용은 보다 복잡해졌습니다. 우리 사회는 똘레랑스 개념의 수용까지는 해냈으나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선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홍세화는 계속적으로 급진적 투사로 활동했습니다. 그 비판의 대상에는 진보 정권도 예외가 아니었죠.

 

홍세화의 말년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은 많이 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진보 정권을 지지한 노동자들의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 진보 정권에 대한 비판을 계속함으로써, 누군가들이 하는 맹목적인 진영 논리 옹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스스로 저버렸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들도 했기 때문이었죠. 특히 신지예를 지지했던 것은 지금 신지예의 상태를 보면 본인조차도 통탄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지는 그가 끊임없이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추구하며 투쟁했던 이였기 때문에 해야 했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던 것은 역시 자신을 무려 20년 동안 파리에서 망명하게 만든 남민전 사건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이재문에 의해 조직된 남민전이 가혹하게 단속된 사건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고문으로 고통받고 죽어간 사람들까지 더해져 우리 현대사 속 폭력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그리고 홍세화와 같은 남민전이었던 이재오가 지금 윤석열 편에서 정치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아이러니기도 하죠. 홍세화를 기억하며 남민전 사건에 대한 글을 발췌해 봤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36261&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이재문은 1934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북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영남일보와 대구일보 기자로 재직했다. 1960년 4·19 직후 민족일보 정치부 기자로 일하며 '통일민주청년동맹'과 '사회당' 활동을 했다. 1964년 '1차 인혁당사건'으로 구속된 그는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석방 후인 1967년 대선을 앞두고 '반독재 재야민주세력 단일후보추진위원회' 활동을 했다.


1969년 여당인 공화당이 박정희의 3선을 가능하게 하려고 추진했던 '3선개헌'이 이루어진 후 그는 대구에서 '민주수호협의회' 대변인 활동을 했다. 그러나 1972년 박정희의 유신 선포 후에는 민주수호협의회가 해체되어 대변인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유신 이후 이재문은 대구에서 <참소리>라는 지하신문을 만들고 유신반대운동을 확산시켰다.


유신체제이던 1974년에는 '인혁당재건위' 조작사건으로 8명이 사형 당하게 되는데, 여정남, 서도원, 도예종 등 희생자 대다수가 대구지역 출신이었다. 이들은 이재문과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던 친구들이었다. 이재문도 '인혁당재건위' 중앙위원으로 수배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는데 만약 검거되었다면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희생자는 9명이 되었을 것이다(관련기사: 박정희는 몸 고문 박근혜는 빚 고문).


이재문은 도예종 등의 죽음을 보고 박정희에게 분노한다. 그리고 박정희가 죽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도피 중이던 1976년 2월 29일 유신정권에 맞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아래 남민전)'를 결성한다. 1975년 5월 13일 박정희가 선포한 '긴급조치 9호'로 모든 반독재민주화 운동이 불법이 된 상황에서 이재문 등이 결성한 비밀정치조직이 남민전이었다.


1979년 10월에서 11월 사이, 이재문을 비롯한 이재오(전 새누리당 국회의원), 이학영(민주당 국회의원),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 등 남민전 조직원 84명이 구속된다. 이재문은 1979년 10월 4일 체포·구속되어 조사과정에서 남영동 대공수사단 소속 경찰관들로부터 극심한 고문을 당한다. 특히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 부터 무차별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뿐만 아니라 '볼펜 고문'(남성 성기인 요도에 볼펜심을 쑤셔 넣는 고문)도 당한다.


필자가 노무현 정부 시절 몸담았던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는 2002년과 2004년 각각 '이재문 사건'을 조사했다. 의문사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재문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법정에서 수차례 진술한다. 하지만 귀 기울여 주는 판사는 아무도 없었다. 또한 조카 이아무개는 구치소로 삼촌인 이재문을 면회 갔을 때도 "입회 교도관 몰래 삼촌이 내게 고문 당했다는 동작을 취했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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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 안에서 이재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식사 시간에 토하는 일이 잦아지고 영양상태가 더욱 나빠졌다. 가족들의 거듭된 요구로 이재문은 1981년 10월 27일 경찰병원에 이송되어 정밀 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병명이 '위유문부협착증(초기위암)'으로 확인되고 수술 권고가 내려졌다.


아울러 경찰병원 측은 이재문에 대한 방사선 촬영을 했으며, 그 결과 "위암일 가능성도 있으니 위내시경 검사를 해야 한다"고 권유하고, 약 3개월간의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구치소장에게 제시했다.


국가는 중요한 범죄피의자라 하더라도 본인과 가족들에게 발병 사실 고지와 적극적인 치료 의무가 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이런 이재문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구치소는 이재문을 입병사시켜 치료를 하면서 알부민 등의 영양제를 주사하고(비용은 가족 부담), 죽과 사과 몇 조각 등을 먹이는 데 그쳤다. 이렇게 외부병원 치료를 거부 당한 후 이재문의 건강은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서울구치소 의무과 의사 김아무개가 1981년 11월 19일 이재문을 진료했을 때, 심한 구토 때문에 음식물을 전혀 섭취할 수 없어 영양실조 상태였으며 전신이 쇠약해져 의욕상실증을 보이고 정신마저 혼미한 실정이었다.


의사 김아무개는 당시 이재문에게 혈관주사를 통해 영양을 공급하기보다, 그를 종합병원에 입원 치료시킴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서울구치소 측은 이재문에 대한 외부병원 치료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사흘 후인 22일 이재문은 위암으로 차디찬 감옥 안에서 옥사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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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홍세화는 '남민전 사건'이 알려지기 전인 1979년 3월 무역회사의 해외파견 직원으로 프랑스에 갔다가 '남민전 사건'이 알려진 뒤 아예 그곳에 망명했다. 홍세화가 겪은 남민전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1995년 그가 망명 중에 쓴 베스트셀러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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