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내가 절대로 그들에게 한 표도 줄 수 없는 이유.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합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시민들은 신군부에 반대하며 거리에서 민주화 투쟁을 벌였고 방학에 연말이라 다소 조용했던 학생들은 봄이 되자 본격적으로 군부 정권에 맞서 투쟁을 가속화합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전두환의 신군부는 계엄령을 확대하고 강경진압을 예고합니다. 군경의 강력한 시위진압에 시민들은 다소 움추려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광주를 비롯한 전남의 분위기는 좀 달랐습니다. 경찰과 지역의 행정기관이 유연하게 시민들의 시위에 대처했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 시민들도 경찰의 통제에 비교적 협조를 잘 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쿠데타 세력에 의한 계엄령 확대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선 시위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참극이 발단이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5월 18일 마침내 김대중이 군부에 의해 구속됩니다. 그리고 광주에 공수부대를 비롯한 전투 부대가 투입되는 거죠.
시민과 군인 모두가 불행해졌습니다. 많은 수의 시민이 총에 맞아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어린아이부터 임산부까지 그들은 가릴 게 없었습니다. 전쟁보다 더한 참극이 광주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현장에 투입된 군인들에게는 광주에 북한군이 잠입했고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교육이 됐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들 손에 묻힌 피가 어떤 피였는지 그들이 겨눈 총부리가 누구를 겨냥했던 것인지 드러나게 되죠. 광주시청을 탈환하면서 군부에 의한 시위 진압은 성공합니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군인들에게 차려진 성찬같은 건 없었습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고 평생 괴물로 불리며 자신의 이름을 감춰야했습니다. 정확한 보고는 없지만 많은 수의 군인들이 PTSD에 시달렸고 그들 중 일부는 자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정말 괴물이 되어버린 군인들도, 잠시나마 괴물의 탈을 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평생을 괴로워하다 죽은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뉴스 영상에 나오는 저들은 어땠을까요. 소준열은 육군대장으로 예편해 한국토지개발공사 이사장까지 하며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주영복은 국방부장관을 거쳐 내무부장관까지 해 먹게 됩니다. 박준병은 군대에서 핵심 요직을 거쳐 12, 13, 14대 국회의원까지 지냅니다. 황영시는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감사원장까지 하죠. 나중에 군사반란재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그해 12월에 사면됐습니다.
빛의 고을이던 광주는 그야말로 어둠의 도시로 그렇게 오랜 시간 숨 죽여 지내야했습니다. 전두환에 의해 193명의 시민이 죽었습니다. 다쳐서 후유증으로 생을 다한 시민이 376명입니다. 65명의 시민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3000명이 다쳤고 1500명이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구속이 됐습니다.
김영삼이 그 쿠테타 세력과 손을 잡아 탄생시킨 정당이 민주자유당입니다. 경상과 충청이 손을 잡고 여소야대에서 무려 217석짜리 괴물 여당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이로서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돼 버리고 부산을 비롯한 경상남도가 급격히 보수화되는 계기가 돼 버립니다. 민주주의는 결국 머릿수 싸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신한국당이 나라를 부도내 정권이 교체됐다고 생각하지만 투표결과 그 지지세에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나라가 망해도 보수당에다 표를 던졌습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IMF가 아니라 이인제였습니다. 친일파가 독립 후에도 그 세력을 이어가며 한국의 지도층으로 탈바꿈 했듯 민주자유당이 신한국당으로 한나라당, 새누리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까지. 그때 그 당이 이름만 바꾼 채 여전히 정치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정치에 대단한 관심이 없어도 남은 생에 저들에게 단 한 표도 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정치 세력에게 다시 표를 줄 만큼 멍청할 수 없는 이유기도 합니다.
황새를 임금으로 세운 개구리들의 말로야 굳이 찾아 듣지 않아도 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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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이름을 자주 바꾼다는건 은폐할 과거가 많거나 사기꾼 둘중 하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