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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게]  이창동 감독이 [시]에서 음악을 안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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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22:48:00

 감독님은 '초록물고기'를 연출하면서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작 '버닝'은 더욱 형이상학적이고 모호한 느낌이 듭니다. 여전히 영화 속에서 현실을 추구하시나요? 아니면 최근 작품에서 발견되는 모호함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특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창동:

"저는 '초록물고기'로 영화계에 입문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신념과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 감독으로서 제가 갖는 끊임없는 탐구는 영화가 얼마나 우리 삶의 현실을 반영하고 질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초록물고기'와 '버닝'에서 현실을 묘사하는 방식이 달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만큼 변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변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초록물고기'를 통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폭력의 논리, 즉 파괴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을 통한 경제 발전의 논리와 무자비한 조직폭력배들의 논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한국 사회의 문제가 더 쉽고 명확했습니다. 요즘은 현실이 더 모호합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더 심해지고, 개인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무력해졌지만, 구체적인 원인을 꼬집기는 어렵습니다. '버닝'이라는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통해 관객들이 우리 현 사회의 이 미스터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최근에 '초록물고기'를 다시 봤는데 영화가 대담하고 인상적인 구성들로 가득 차 있다고 느꼈습니다.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 소설가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특유의 구성 감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합니다. 타고난 감각일까요? 아니면 다른 영화를 통해 배운 걸까요?


이창동: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인생을 통한 경험이 영화 감독으로서 저를 형성했습니다. 제 예술적 취향은 어린 시절 마을의 산과 들, 오래된 우리 집, 전쟁 후 가난했던 도시의 골목길, 그리고 가족이 함께 살았던 작은 셋방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제 글은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감정들 – 슬픔, 고통, 좌절, 사랑, 꿈, 희망 – 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책과 영화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저만의 예술적 센서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센서가 작동하는 방식은 제 영화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박하사탕'을 처음 봤을 때, 기차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시적으로 담아낸 것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 내내 있었던 감정적으로 격렬한 장면들 사이에서 그 기차 장면들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터와 같은 순간이 되었기 때문에 더욱 큰 울림을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이 아이디어를 어떻게 떠올리게 되었으며, 구조적 장치로 '기차'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창동:
'박하사탕'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관객들에게 시간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입니다. 저는 기차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영화에서 챕터가 진행됨에 따라 기차의 시점으로 시간을 거슬러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차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주는 동시에 챕터 사이 스크린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차는 그 자체로 평온한 느낌을 줍니다. 우리는 들판 한가운데를 달리는 기차를 볼 때 향수를 느끼죠.


시간의 의미를 환기시키기 위해 주인공 영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기차가 등장합니다. 그가 저지르는 비극적인 살인의 마지막 현장에서 기차는 정지해 있습니다. 또한 기차 자체도 영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차의 발명은 시간과 속도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변화시켰죠. 영화는 시간을 재현하는 매체입니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최초의 영화가 '열차의 도착'이라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노는 감독님의 모든 작품, 특히 초기 작품의 주인공들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감정입니다. 또한 스토리텔링의 요소로서 분노가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분노라는 감정을 활용한 다른 작가나 작품 중 인상 깊었던 것이 있나요? 


이창동:
"의외로 분노를 주제로 한 예술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계급, 불평등, 소외의 문제에 비해 사람들의 분노는 비교적 최근에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파시즘을 사례로 하여 사람들의 분노를 정치에 악용하고 확장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분노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탐구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필립 로스의 '울분'은 매우 독특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배경은 한국전쟁이지만 주인공이 의미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은 오늘날의 세상에 대한 경고입니다.



감독님의 초기 작품들에서, 여성 인물들은 남성 인물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남성성을 비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밀양'과 '시'는 여성 주인공들이 그들의 세계와 그들의 존재를 탐구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반면에, '버닝'의 여성 주인공은 영화 중반에 사라지지만, 영화는 "이 여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렇게 관점을 확장하게 되면서 감독님 영화의 캐릭터와 범위가 어떻게 변화했나요?


이창동:

"제 영화 속 주인공은 무모한 싸움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무력한 개인입니다. 주인공이 여성이라면 그 투쟁은 더 복잡해지고, 자신을 억압하는 외부 세계에 대한 질문은 더 근본적인 것이 됩니다. 그들의 투쟁은 그들의 정체성이자 제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주인공 미자가 친구와 가족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녀의 관심을 구하는 유일한 사람들(성폭력 가해자 부모 모임, 그녀가 돌보는 노인, 기자들)조차도 여전히 그녀를 개인으로서 홀대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소외와 지병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주변 상황에 대해 열정적으로 궁금해합니다. 미자의 호기심은 감독님 본인으로부터 나온건가요?


이창동:

"미자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여성입니다. 친한 친구도 없고, 함께 사는 손자와도 대화가 통하지 않으며, 본인이 "영원한 친구"라고 부르는 딸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닳고 닳은 세상은 그녀의 아이 같은 순수함을 속이기 쉬운 어리석음으로 취급합니다.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지만, 여전히 주변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있습니다. 즉, 타인의 아픔에 대한 세심한 공감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모든 작가와 예술가의 출발점입니다."





 



안타깝게도, 윤정희 선생님은 작년에 알츠하이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분은 사실 감독님의 영화 '시'에 출연하기 위해 은퇴로부터 복귀하셨던거죠. 함께 작업하기로 결정한 계기는 무엇이고, 어떤 대화를 나눴으며, 함께 일한 경험은 어땠나요?

이창동:
"윤정희씨는 젊은 시절 3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던 전설적인 여배우였지만, 결혼 후 한국을 떠나 16년 동안 스크린에서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쓰기 전부터 주인공은 윤정희여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대안은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제에서 한두 번 만났을 뿐인데도, 그분이 실제 미자처럼 느껴졌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내용을 듣고 그 역할을 열정적으로 맡고 싶어했습니다. 그분의 남편은 나중에 각본을 읽고 주인공 성격이 아내와 너무 닮아 놀랐다고 하시더군요. 윤정희씨는 제 연출 스타일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따라줬습니다. 그 분이 한창 활동할 당시에는 영화에 싱크 대사가 없어서 모든 대사를 더빙으로 처리해야 했고 연기도 훨씬 더 커야했죠. 이 영화에서 윤정희씨는 미자 역할을 잘 연기해냈다기 보다는 미자로 사셨던 것 같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이 영화를 찍을 때 알츠하이머 증상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대사를 외우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미자가 점점 단어들을 잊어가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윤정희씨도 점점 대사를 잊어가면서 미자를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시'에서는, 노래방 장면을 제외하고는 어떤 형태의 음악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물이 흐르는 소리와 함께 시작되고 끝이 납니다. 음악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정해진 결정이었나요, 아니면 영화와 어울리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사용하지 않은 건가요?

 


이창동:
"저는 영화에서 음악 사용을 자제하는 편입니다. 영화 음악은 감정적인 공명을 증폭시키기 위해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제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이 실제 음악이 없는 장면에서도 음악성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저는 영화 제작의 모든 단계를 통해 장면의 내재된 음악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시'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영화입니다. 저는 관객들이 바람, 비, 자동차,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같은, 인위적인 간섭 없이, 우리 삶의 일상적인 분위기 안에서 음악성을 느끼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영화, 특히 '시'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모든 음악을 제거하는 것에 대해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작곡가에게 사운드트랙을 만들게 했습니다. 사운드트랙은 아름다웠지만, 저는 마지막 믹싱 단계에서 음악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작곡가는 매우 아쉬워 했지만, 감사하게도 제 결정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버닝'이 개봉했을 때만 해도 블랙리스트와 같은 정부의 예술 탄압이 지난 10년간 동료들을 위협했다는 언급과 함께 한국 영화의 미래를 낙관했습니다. 그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 한국 영화 산업이 더 나은 곳에 있다고 느끼시나요?


이창동:
"당시에는 낙관적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한국 영화계는 현실적인 위기에 처해 있고 그 전환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부터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팬데믹이고, 2, 3년 동안 관객들은 극장에 갈 수 없었습니다. 또 하나는 스트리밍 서비스의 부상과 같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입니다. 이 두 가지는 관객들의 인식과 습관을 바꿨습니다. 사람들은 극장에서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영화를 다른 형태의 엔터테인먼트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의 근본적인 변화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진행될 프로젝트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창동:
"현재 두 개의 다른 프로젝트를 동시에 쓰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어떤 것을 먼저 추진할지 모르겠지만 결정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https://thefilmstage.com/lee-chang-dong-on-the-power-of-anger-and-empathizing-with-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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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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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23:27:03

그래도 멋진 노래를 탄생케 하긴 했죠~

 

https://youtu.be/X62PHRWJuPA?si=cT8pVq728aWHvPaK

 

https://youtu.be/DSdWqIh0kdA?si=fKbDNqQXZYcxMLK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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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5 08:59:49

 시 촬영당시 이미 알츠하이머 증상이 시작됬다는게 충격적이네요.

항상 응원하는 감독님입니다. 건강하시고 작품 주기 좀 줄여주시면 감사하겠네요 ㅎ

2024-04-15 11:27:44

 '시'는 DP에서 공동구매형식으로 블루레이를 만들었었죠. 잘 소장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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