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예전에 공항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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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리오님이 올려주신 글을 보고 옛날 생각이 나서 답글을 달다가 내용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새로 글을 씁니다.
좀 오래 된 이야기인데 예전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면서 공항 로비에서 시간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워낙 주의력이 없기도 하고, 그날은 유독 이것저것 물건이 많아서 번잡스러웠어요. 거기다가 시간을 보낸다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책을 읽느라 탑승 직전까지 제 물건들을 점검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슬슬 시간이 다가와 이것저것 빠진 것이 없나 점검을 했는데, 가장 중요한 지갑이 없는 겁니다. 너무 당황해서 제가 지나친 장소들을 돌면서 심장이 조여오고 있었는데, 마침 안내방송이 나오더군요. 지갑 분실물이 들어와 있으니 인포메이션에 와서 찾아가라고요. 그래서 안내데스크로 가서 간단하게 확인하고 분실물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지갑을 열어보니 거기에 영어로 쓴 쪽지가 한 장 들어있더라고요. 당신이 이 지갑을 찾았길 바라고 좋은 여행행이 되라고. 그리고 서양식 이모티콘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정말 얼마나 고맙던지 독일에 대한 인상이 확 좋아지더라고요.
물론 여행을 하면서도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교통이 압도적으로 편리하고 깨끗해서, 그리고 자연환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좋긴 했지만, 그때는 라틴 유럽 국가들의 문화적 유산들에 더 관심이 많을 때라, 음식이고 문화고 뭔가 좀 심심하다고 느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비현실적으로 화려하고 낭만적이라서 고대의 환상을 자극하는 뭔가가 부족했고요.(사실 그때 여행의 목표 중 하나가 유럽 각지의 박물관에 흩어진 약탈된 이집트 유물들을 직접 보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거리의 어느 카페에서 만난 터키인과 대화를 하면서 그들이 아직도 은근한 인종차별을 경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해서 그렇게 정이 가는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감정이라는 것이 비합리적이라서 그런지, 센스있는 쪽지 한 장이 곁들여진 그들의 배려에 정말 좋은 감정이 들더라고요. 물론 제 지갑을 습득해서 인포메이션에 맡긴 사람은 타국에서 온 저와 같은 여행자였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 장소에서 제가 그러한 친절을 경험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다음에 독일의 여러 지역을 다시 한 번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독일의 현대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음악이나 미술, 문학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건성으로 지나친 것이 많았거든요.
그러나 이러한 관심도, 독일에서 경험한 푸근한 배려가 없었더라면 그보다 더디게 찾아왔을지도 모르죠. 작더라도 상대에게 호의와 배려를 받으면 상대가 좋아지고 관심이 생기게 됩니다. 그 때, 제 지갑을 습득해 수고롭게 돌려주신 분이나, 뉴스의 버스기사 같은 분들이 있어서 사람들은 큰 도움을 받고 더 큰 사랑을 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바가지 요금을 씌우고, 물건을 훔치며, 인종차별을 저지르는 동안에도 말이죠. 이렇게 남들이 당할 고난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기꺼이 도우면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함을 보이며, 사례는 생각하지도 않는 자신의 강직한 도덕률을 지키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그다지 욕망하지 않기에 드문 것 처럼 보이는 거죠. 이런 분들이 그나마 악이 횡행하고 그 횡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그저 적응하려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에서 큰 위안과 감동을 줍니다. 세상에는 아마도 배려 없고 악한 일들이 더 많이 벌어지겠지만, 이런 분들이 주는 기억들이 그나마 사람들이 완전히 절망하지 않도록 희망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저 같이 그저 적응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면서 남들의 허물만 보는 사람에게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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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좋은 사람들이 있네요. 좋은 기억으로 남으셨다니 글을 읽는 저도 좋았습니다. 글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글 맛나는 시간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