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손아람 <세계를 만드는 방법>
나온 지는 좀 된 책인데 (초판 : 2018년 7월 9일), 영화 <소수의견>의 각본을 쓴 손아람 작가의 글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꽤 재미있는 문장들이 많은데, 조금 인용해보겠습니다.
"탐욕 논변의 기저에는 공포가 도사린다. 이기기 어려운 존재와 싸우는 건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강자의 탐욕을 문제 삼지 않는다. 이길 수 없다면 그것은 불변의 상수이고, 불변의 상수라면 그것은 탐욕의 지위에서 면책된다. 하지만 누군가는 탐욕의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의 비난은 '바꾸기 쉬운 것'을 찾아 아래로 향한다. 노동조합이 파업만 하지 않는다면. 직원들의 임금만 동결된다면. 더 많은 시간을 일해만 준다면. 추가수당을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지대 상승을 방어할 수는 없으니 최저임금 상승을 방어할 수만 있다면. 지긋지긋한 노동자들의 탐욕만 줄일 수 있다면!
조삼모사.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냐,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냐의 문제다. 제발 좀 진짜 질문을 시작하자. 왜 우리가 나눠야 할 몫이 일곱 개여야 하는가?"
"하종강 교수는 악하지는 않지만 평소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를 향한 적대성을 쉽게 드러낸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그들의 삶과 기억은 아름다운 장소, 좋은 사람들, 행복한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의견을 보태자면 완강하게 보수적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낙관적이며 합리적이다. 올바른 세상을 원하되, 경험에 의존한 증명을 신뢰하고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논증을 경계한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기업을 위협한다. 노동에 대한 기업의 은밀하고 지속적인 위협은 쉽게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의 우경화는 복지제도의 영구적 실패를 뜻한다. 경제제도의 좌우 진동 리듬은 기억 이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개발자본으로 높아진 소득 수준에 감사하는 제 3세계 주민들은 자본주의의 효과적 작동을 증명한다. 관광객의 여행 동선은 개발자본에 터전을 빼앗긴 채 밀려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없도록 짜이기 때문이다. 자수성가한 영웅의 일화에서 희망을 엿본다. 빈손에서 빈손으로 끝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기삿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은 쉽다. 행복으로 가득한 기억 속에 머무는 삶. 그 행복은 개인적 성취이거나, 부유한 생활이거나, 지지 세력의 정치적 안정일 수도 있다. 그러려면 먼저 타인의 불행과 불평을 기억 바깥으로 밀어내는 결정이 앞서야만 한다. 그것은 낭떠러지 너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계 모형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 모형은 스스로 낭떠러지 아래로 떠밀리는 불가항력의 사건이 덮쳐오는 순간에 예외 없이 금이 간다. 질문. 나의 기억을 선택하면, 나의 추락도 철회될까?"
"유권자 이동에는 문화적 압력이 크게 작용한다. 새 세대 유권자들은 뚜렷한 정치성향을 갖기보다 망가진 기성세력을 응징하자는 호소에 쉽게 끌린다. 그들은 보수를 자처하는 노인들의 완고함에 질려 있고, 보수 정치인의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모습을 조롱하며, 그들과 한 묶음으로 취급되면 창피함을 느낀다. 이들은 진보, 좌파, 개혁을 기치로 내건 젊은 정당들로 흩어져 눈에 띄지 않게 두터운 지지층을 형성한다. 그리고 노동조합을 경멸하거나 페미니즘을 적대하거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은 언제나 윤리적이라는 목소리를 정당 지지자의 이름으로 낸다. 다른 새의 둥지에서 알을 깨고 나온 뻐꾸기처럼 자신이 보수주의자임을 깨닫지 못한 채로. 이러한 유권자 행동심리를 연구한 토드 로저스는 투표를 정치행위가 아닌 사회적 표현행위로 재규정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현재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데 나름 흥미로운 주장이 맘에 드는군요.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2022-09-14 12:30:52
끝까지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도해봐야겠네요.
2022-09-14 14:08:04
좋은 책 추천 감사드립니다. 손아람 작가 칼럼은 몇번 읽어봤었는데 책도 냈었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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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기성세력을 응징하자는 호소에 쉽게 끌린다 --> 이 문장이 확 와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