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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손아람 <세계를 만드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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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9-14 12:06:51

나온 지는 좀 된 책인데 (초판 : 2018년 7월 9일), 영화 <소수의견>의 각본을 쓴 손아람 작가의 글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꽤 재미있는 문장들이 많은데, 조금 인용해보겠습니다. 

 

"탐욕 논변의 기저에는 공포가 도사린다. 이기기 어려운 존재와 싸우는 건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강자의 탐욕을 문제 삼지 않는다. 이길 수 없다면 그것은 불변의 상수이고, 불변의 상수라면 그것은 탐욕의 지위에서 면책된다. 하지만 누군가는 탐욕의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의 비난은 '바꾸기 쉬운 것'을 찾아 아래로 향한다. 노동조합이 파업만 하지 않는다면. 직원들의 임금만 동결된다면. 더 많은 시간을 일해만 준다면. 추가수당을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지대 상승을 방어할 수는 없으니 최저임금 상승을 방어할 수만 있다면. 지긋지긋한 노동자들의 탐욕만 줄일 수 있다면!

조삼모사.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냐,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냐의 문제다. 제발 좀 진짜 질문을 시작하자. 왜 우리가 나눠야 할 몫이 일곱 개여야 하는가?"

 

"하종강 교수는 악하지는 않지만 평소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를 향한 적대성을 쉽게 드러낸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그들의 삶과 기억은 아름다운 장소, 좋은 사람들, 행복한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의견을 보태자면 완강하게 보수적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낙관적이며 합리적이다. 올바른 세상을 원하되, 경험에 의존한 증명을 신뢰하고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논증을 경계한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기업을 위협한다. 노동에 대한 기업의 은밀하고 지속적인 위협은 쉽게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의 우경화는 복지제도의 영구적 실패를 뜻한다. 경제제도의 좌우 진동 리듬은 기억 이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개발자본으로 높아진 소득 수준에 감사하는 제 3세계 주민들은 자본주의의 효과적 작동을 증명한다. 관광객의 여행 동선은 개발자본에 터전을 빼앗긴 채 밀려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없도록 짜이기 때문이다. 자수성가한 영웅의 일화에서 희망을 엿본다. 빈손에서 빈손으로 끝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기삿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은 쉽다. 행복으로 가득한 기억 속에 머무는 삶. 그 행복은 개인적 성취이거나, 부유한 생활이거나, 지지 세력의 정치적 안정일 수도 있다. 그러려면 먼저 타인의 불행과 불평을 기억 바깥으로 밀어내는 결정이 앞서야만 한다. 그것은 낭떠러지 너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계 모형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 모형은 스스로 낭떠러지 아래로 떠밀리는 불가항력의 사건이 덮쳐오는 순간에 예외 없이 금이 간다. 질문. 나의 기억을 선택하면, 나의 추락도 철회될까?"

 

"유권자 이동에는 문화적 압력이 크게 작용한다. 새 세대 유권자들은 뚜렷한 정치성향을 갖기보다 망가진 기성세력을 응징하자는 호소에 쉽게 끌린다. 그들은 보수를 자처하는 노인들의 완고함에 질려 있고, 보수 정치인의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모습을 조롱하며, 그들과 한 묶음으로 취급되면 창피함을 느낀다. 이들은 진보, 좌파, 개혁을 기치로 내건 젊은 정당들로 흩어져 눈에 띄지 않게 두터운 지지층을 형성한다. 그리고 노동조합을 경멸하거나 페미니즘을 적대하거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은 언제나 윤리적이라는 목소리를 정당 지지자의 이름으로 낸다. 다른 새의 둥지에서 알을 깨고 나온 뻐꾸기처럼 자신이 보수주의자임을 깨닫지 못한 채로. 이러한 유권자 행동심리를 연구한 토드 로저스는 투표를 정치행위가 아닌 사회적 표현행위로 재규정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현재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데 나름 흥미로운 주장이 맘에 드는군요.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님의 서명
베어스의 일곱번째 우승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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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2-09-14 12:06:00

 망가진 기성세력을 응징하자는 호소에 쉽게 끌린다 --> 이 문장이 확 와닿네요... 

WR
2022-09-14 12:08:08

이 글이 씌여진건 2017년 대선 이후였습니다. 이와 유사한 일이 이번 대선에서도 일어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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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4 12:11:03

인터넷 댓글을 보다보니 '나이 든 사람을 구조조정하고 젊은 사람을 채용할거다'란 기대에 찬 20대가 많았다고 하는데 이것과 연결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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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4 12:12:14

 우리가 어렴풋이 알지만 정확하게 모르는 일들에 대해서 새로운 학술적 주장과 빈틈 없는 논리로 실하게 채운 문장들이네요. 다만 이것이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쓴 글이라면 단어들을 조금 더 새심하게 골라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썼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논변이나 기저 같은 단어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서두에 오면 바로 책 덮어버릴 사람들도 생각해야죠.

WR
2022-09-14 12:14:07

아, 제가 인용한 글은 서두에 나오는 글이 아니라 대부분 글 하나의 엔딩에 해당하는 글들입니다^^

2022-09-14 12:19:55

그렇군요. 만약 탐욕 논변이 앞에서 충분히 설명되었다면 괜찮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학술 논문이 아닌 다음에야 저런 단어들은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탐욕으로 인해 사회가~ 한다는 주장 뒤에는 이라고 써도 충분히 짧고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텐데요.

1
2022-09-14 12:15:04

저는 한자세대이고 이해가 안가는 문장이 하나도 없는데도

왠지 단어의 선택이 권위적으로 느껴집니다.

젊은 세대들은 더 싫어할 것 같네요.

2022-09-14 12:22:48

손아람 작가가 80년대 생인가 그럴 겁니다. 머리도 상당히 좋은 걸로 알고요. 아마 저런 단어들이 자신에게는 자연스러워서 남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했거나, 일부러 귄위있게 보이려고 했거나 그랬을 수 있겠죠. 이해는 됩니다. 저도 뭐 트집을 잡긴 했지만 그런 트집으로 글 전체를 폄하하기에는 글 내용이 많이 괜찮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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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4 12:23:27

바로 보셨어요. 잘 쓴 문장이되 그들만의 리그에서 수건 돌리기입니다.

Updated at 2022-09-14 12:35:49

첫 단락은 프차와 시정게를 합쳐야 하는 주장과 일치하고 두번 째는 가진 자들과 행복이나 이상적 가치나 도덕률을 공유하면서도(그것까지는 인간적으로 인정) 인지부조화적 판단을 하게되는 현실들 이를테면 종부세 판타지, 가까이는 이준석의 비단 주머니 같은 레토릭을 연상시키네요. 마지막은 아아,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최근 1,2화가 나오고 다음 주를 기다리고 있는 변상욱 쇼(8, 9화) 유시민 편 시청 추천드립니다. 아주 쉽습니다.

2022-09-14 12:30:52

 끝까지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도해봐야겠네요. 

2022-09-14 14:08:04

좋은 책 추천 감사드립니다. 손아람 작가 칼럼은 몇번 읽어봤었는데 책도 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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