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류근 시인의 글. 내가 가난했을 때
시인의 지나간 회상의 글에 감정이 깊이 각인되어 있어 묵직한 무언가가 들어 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때 강원도 횡성에서 고추농사를 지으며 산 적이 있었다. 다 허물어져가는 농가주택에서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 닭 열 세 마리, 오리 일곱 마리, 소가 한 마리 함께 살았다. 재산의 거의 전부였던 소는 번번이 임신에 실패해서 어머니 애를 태웠다. 아홉 가구가 사는 동네였다. 하루에 두 번 버스가 다녔다. 라면 한 봉다리를 사기 위해서 왕복 2시간여 산길을 걸어야 했다. 구름이 좋은 길이었다.
인도에서 돌아온 직후였기 때문에 그다지 삶이 비관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가난하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텃밭에서 나는 것들로 자급자족하며 글만 써서 먹고 살 궁리를 했다. IMF 시절이었다.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잡문 하나 받아주는 데가 없었고 농사는 다 팔아도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 그래도 역시 나는 그다지 불행하지 않았다. 가난하다고 불행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어찌어찌 그 집을 떠나왔고 그 집은 빈집이 되었다. 어떤 분이 그 집을 빌려달라고 했다. 원주에 살면서 가끔씩 들어와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며 지내는 곳으로 삼겠다고 했다. 어차피 빈집이고 팔리지도 않는 집이었다. 사람이 없으면 곧 허물어질 상태여서 그냥 그러마 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분이었는데 목소리만으로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 일이년쯤 전에 지나던 길에 그 집에 들러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장애가 있는 분이었다. 살림이 너무나 옹색했다. 아, 20여년 전에 내가 이런 집에서 살았구나 생각하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분은 장애 때문에 성장이 부실해서 몹시 왜소했으나 총기가 있었고 경우가 밝았다. 우리는 그렇게 잠깐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집이 쓰러지지 않은 것을 고마워하면서.
엊그제 그의 이름으로 전화가 왔다. 내가 반갑게 인사를 하자 건너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자신은 그분의 형이고, 그분은 최근에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전화번호를 없애기 전에 알려야 것 같아서 전화했다고 했다. 나는 그때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 그랬군요...라는 말을 한 열 번쯤 혼자 읊조렸던가. 이제 곧 빈집으로 쓰러져갈 집의 안부를 걱정했던가. 사는 게 허망하다는 생각을 했던가.
올해는 유독 지인들의 부고가 많았다. 나는 그들의 부고가 들려올 때마다 내상을 입고 울었지만 그런 게 그들의 빈 자리를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거였다. 살아서 더 부지런히 만나지 못하고 부대끼지 못한 것이 미안할 뿐이었다. 어떻게 더 이 삶의 무게를 견뎌야 세상에 온 값어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은 좀 했을까. 점점 더 사는 일이 무거워지고 막막해진다. 사람으로 살아있을 때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하찮아질 겨를이 없다.
푸른 귀밑 머리에는 젊은 날의 근심이 어리네
외로운 달은 서로를 지키기를 원하니
원앙은 부러우나 신선은 부럽지 않네
글쓰기 |
짧막하지만 좋네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