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VER HEALTH CHECK: OK
ID/PW 찾기 회원가입

[영게]  <바빌론>을 보고 나서 잡상 (스포 있습니다)

 
12
  1211
Updated at 2023-02-02 12:19:54

<바빌론>을 보았습니다. 대공황 직전 무성영화 시절부터 <재즈 싱어>로 토키가 시작되고, 이제 토키 방식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무성영화 시절의 대배우들이 목소리가 이상하다던지, 이제 대사를 암기해야 한다든지의 이유로 새로운 영화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 모두가 마치 바빌론의 위대한 문명들이 무너지듯이 사라지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대공황 이전의 미칠듯한 도금시대의 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대부호가 수많은 유명인들을 초대하고 거기에 코끼리를 볼거리로 끌어들이고, 사람들은 술과 마약에 취해서 온갖 기행과 난교를 일삼는 시대. 그 시대의 쾌락은 이미 그 시대의 풍선이 한순간에 터져버린 대공황이라는게 올 것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묘한 슬픔까지 전해줍니다.  수십년 뒤에 우리 나라에서도 IMF를 앞둔 '단군이래 최고의 호황기'였던 90년대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성영화 시대에 배우들이 해야 할 것은 바로 '표정'이었습니다. 배우들은 대사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지요. 대사야 나중에 영상과 영상 사이에 끼어들어갈 그 무엇이었고, 배우는 감독이 제시하는 요구에 맞춰 빛 속에서 표정으로 연기를 했습니다. 전 지금도 '마지막 무성영화의 거장'이던 무르나우의 <선라이즈>에서의 그 남편과 아내의 표정 연기를 잊지 못하겠습니다. <바빌론>에서도 술에 떡이 되어서 비틀거리던 잭 콘라드가 상상속에 존재하는 여인을 만나서 키스하는 장면에서 그는 촬영하는 그 순간에는 위대한 기사로 변신하고, 그런 그에게 서산에 지기 직전의 마지막 햇빛은 마치 휘광처럼 그를 감쌉니다. 그리고 영화에서의 위대한 기적의 순간처럼 하필 그 순간에 나비 한 마리가 그의 등에 앉습니다. 

 

하지만 이제 토키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배우들은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해야 하고, 대사를 암기해서 뱉어내야 합니다. 더이상 표정이 연기의 중심이 아닌, 대사가 연기의 중심이 되는 시대가 왔습니다. 영화 <싱잉 인 더 레인>에서는 우스꽝스럽게 표현했지만, 사실 영화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토키 영화는 영화 예술로서는 퇴보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결국 사기술이기 때문이지요. 영화에서의 심장을 뒤흔드는 그 연기는 결국 사기입니다. (임권택 감독님의 표현입니다) 다만 "그딴 것 없지만 있음직하게 보여야 한다"는 측면에서 사기라는 것이죠. 

 

영화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영화가 등장인물의 심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이전 무성영화에서는 이것을 표정으로 행했습니다. 그 배우가 드러내는 감정이 표정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것을 본 관객에게 그 표정은 이미지로, 상징으로 관객의 심정에 감독이 드러내려고 했던 그 감정으로 건드리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제 토키의 등장으로 영화는 표정을 통한 전달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결국 대사로 주저리주저리 읊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대사로 전달되는 감정은 관객들을 지루하게 할 뿐입니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등장했던게 이후 누벨바그라는 영화 사조였죠. 

 

영화를 위한 영화는 언제나 사람을 슬프게 만듭니다. 그건 영화라는게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요건, 즉 배우를 미이라화 시킨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우는 늙고, 그리고 죽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영화를 통해 영원히 그 배우를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박제시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배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그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찍은 영화는 그 영화를 보던 시절의 관객의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게 되고, 그건 결국 지나간 아름다운 시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 시절에 대한 회한을 불러오기 때문이겠지요.

님의 서명
베어스의 일곱번째 우승을 기원하며.
3
Comments
3
Updated at 2023-02-02 12:25:40

생각보다 많이 웃으면서 바빌론을 봤지만, 어딘가 계속해서 서글펐던 이유가 시네마토그라프님의 평에 있네요. 제겐 최근에 영화관에서 본 영화중에 가장 좋았습니다.  혹시라도 보실분들은 (나중으로 미루지 마시고)가능하면 영화관에서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1
2023-02-02 12:52:3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공감이 듭니다.

1
2023-02-03 02:11:11
저는 피곤한 몸으로 빵 형님의 팬심으로
개봉 날 보러 갔네요~
그런데 글재주가 없어 뭐라 표현하기가 그랬는데
저 또한 시네마토 그라프 님의 감상기를 읽고 나니~
N차 관람의 의욕이 생기네요.
위 moongchi 님, 아미바 님처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놓으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쓰기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