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82년생 김지영 (2019)
메이크업하고 립스틱 바른 돼지
[스포일러 있음]
대현 (공유) 이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고 있다. 아내 지영 (정유미) 이 이상행동을 보여서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다. 광고기획사에 다니던 중 대현을 만나 결혼한 지영은 딸 아영을 임신하고 산후우울증에 시달리게 된 주부다. 지영은 출산 후에도 육아와 집안일을 병행하다 어느 날, 대현의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어머니 (김미경) 에게 친어머니 미숙 (김미경) 이 빙의된 듯 말한다. 이후 대현의 전 애인과 돌아가신 할머니 (강애심) 흉내도 내는 등 이상증세가 심해진다. 대현이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전전긍긍 하는동안 <82년생 김지영>은 미숙부터 시작해서 지영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 만연했던 여성차별을 훑기 시작한다.
서양 격언으로 알려진 '립스틱을 바른들 돼지는 돼지다', 즉 '돼지 얼굴에 립스틱' 이란 비유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개념으로만 따지면 16세기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작가 스텔라 기븐스가 1946년에 쓴 소설인 <웨스트우드> 에서 '돼지에게 립스틱을 바른다' 로 해당 문장이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버락 오바마가 사라 페일린에게 해당 비유를 썼다가 성차별 발언이라는 역풍을 맞는 바람에 언제부턴가 대표적인 여성혐오 발언처럼 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의미로 치장한들 본질을 바꿀 수는 없음을 뜻한다. 이 절묘한 격언이 다시 떠오른 계기는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영화화 된다고 했을 때였다. 원작은 2017년 한국에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후 중국과 일본, 대만 등 아시아권에서 호응을 얻으며 나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페미니즘의 코란' 으로 비유됐으며 완성도에 관한 갑론을박으로 문학계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기도 했다. 논란의 근원은 주로 김지영이 당한 차별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그 시대에 이런 일이 있을 리 없다, 있다 등으로 일반화가 가능한지였다. 무릇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서 단순화를 거친 결과물이 창작물인 만큼 어쩌면 이해 가능한 성질의 논란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는 순간 작품 수준도 함께 결정된다. 그 점에서 <82년생 김지영>은 논쟁으로 쳐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건이나 주인공을 얄팍하게 단순화시킨 소설이다. 여성들의 고통을 이해하라는 의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극적인 TV 드라마처럼 차별의 차별로 이어지는 전개방식을 취했다. 이 원작이 흥미로워지는 지점이 있다면 바로 이야기 진행방식 뒤에 보이는 강렬한 욕망이 모습을 드러낼 때였다.
원작은 주인공 김지영의 이야기를 현실 기반이라고 주장하고 싶어서 연구, 정책자료, 통계 등을 인용하며 르포 형식을 가미했다. 지영이란 인물과 <82년생 김지영> 서사가 곧 한국사회에 대한 상징이자 고발의 최전선이라는 식으로 공신력을 얻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본문에다 수많은 각주를 달아 관련 자료를 접목시키고자 하는 작가주의적 욕망, 한국여성인권의 실태를 알리겠다는 공명심도 컸을지 모른다. 그 결과, 원작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이자 여성인 김지영에게 끊임없이 고난을 안기며 착취하는 형태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유교사회에 대한 비판을 다루려 했다면서 정작 노출 착취에 방점이 찍혀 있던 '홍살문' 류 사극을 봤을 때 느꼈던 난감함과 비슷하다. 지금도 원작소설이 지닌 욕망의 의중이 뭔지 궁금하다. 공신력을 얻으면 작품이 지닌 빈약한 알맹이가 가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원작 속 김지영은 통계와 자료를 '보편적으로' 대변하는 도구에 가깝다. 인물이 아니다.
어째서인지 영화판 <82년생 김지영>은 원작에서 이야기 자체를 크게 바꾸지는 않았다. 바꿀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어른들의 사정으로 바꿀 여지가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이건 안되겠다 싶었나보다. 원작의 르포 형식으로부터 김지영을 해방시킨다. 덕분에 인간으로서의 김지영이 부각되며 원작에서는 악역이었던 남편 대현의 비중과 포지션이 달라지면서 부부 이야기가 나름대로 재미를 찾는다. 원작은 김지영이 어릴 때부터 당한 성차별 사례를 제시하다가 끝에 이르러 이 모두가 그녀와 대현의 정신과 상담기록 내용이었음을 알리며 마무리 된다. 영화판은 중간중간 대현이 지영 몰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는 장면을 통해 그녀가 환자임을 더 명확히 해두고 있다. 그래서 김지영의 정서상태와 공허해진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판은 관객들에게 '너와 나의 이야기' 로 다가가기 용이해졌다. 학생시절 김지영이 남학생에게 스토킹 위협을 받거나, 회사 화장실에 설치된 몰래카메라를 발견하고 불안해 하는 식의 원작 이야기들은 여전히 나온다. 그러나 전반부만 보면 같은 이야기일지라도 사례를 제시하고 뒤이어 불안감에 떨었을 여성의 심리를 공감하게 만드는 방식이 더 세련됐다. 김지영의 말이 통계를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회 일원이 된 여성' 이 내는 목소리로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웃기다. 등장인물 서사를 유려하게 다룰 수 있는 매체는 소설이다. 문장으로 세세하게 묘사가 가능하지 않은가. 그런데 제한된 시간 안에 표현해야 하는 영화판이 오히려 인물에 더 신경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다니. 영화판에서 김지영이 집이나 밖에서 주부가 된 친구들, 직장 동료들과 대화하는 장면들이 인상깊은 이유다. 누군가는 승진이 좌절됐거나 엄마가 되면서 꿈을 포기해야 했다. '만약에' 를 가정하며 이들이 웃고 떠드는 장면들은 막막한 현실을 가벼운 담소로 잊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 소소하고도 즐거운 시간이 갑작스럽게 단절되고 김지영 혼자 식탁에 앉아있는 샷이 등장하며 현실을 자각시키는 연출이 나올 때, 작품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정유미 배우의 호연, 김태성 음악감독의 풍성하지만 예민한 듯한 현악 스코어까지 더해지니 거의 칼날 위를 걷는 위태로운 느낌마저 들 정도다.
그러나 영화판은 '원작 만듦새를 보완하기' 를 최대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곧 한계를 마주한다. 영화판은 원작이 과격한 형식으로 표현한 여성 고난 서사를 공감시키려는 방편으로 신파를 택했다. 지영은 새로운 광고회사로부터 영입제안을 받는다. 그녀는 불안정한 내면을 진정시킬 기회를 얻었지만 시어머니가 반대하면서 좌절된다. 그리고 친어머니 미숙이 지영의 상태를 알게되는 중반에 이르면서 신파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다. 영화판은 딸을 본 미숙이 흘리는 눈물을 기점으로 원작에서 가져온 김지영을 비롯한 여성들의 고난사를 덜 과격한 수위로 전시하는 정도에 만족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남성관객들 보라고 만든 예방광고 같은 중후반부는 좋은 연출과 나름대로 개성을 보여줬던 전반부에 비해 평범해진다. 그리고 원작에 존재했던 지영의 취업좌절 이야기로 인해 영화판에서 직장생활과 고뇌를 묘사하는 식으로 대현의 비중이 늘어난 이유 또한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김지영은 과거 광고회사 재직 중에 유능한 팀장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경험이 있다. 그녀가 재취직을 추진하는 이유는 마음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함이지만 자아 실현적 측면이 크다. 그래서인지 지영의 취업 좌절 이야기가 등장하자 영화판이 대현과 그 회사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도 일순간 묘해진다. 대현이 다니는 회사풍경이 잠깐 등장할 때마다 그 곳 직원들이 설렁설렁 담배나 피워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남성이 여성보다 손쉽게 사회생활에 진출해서 자기 자아를 실현하고 있다는 시선이 느껴진다. 남녀 불문하고 과연 자신이 꿈꿨던 일을 하며 자아실현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특히 그 사람이 결혼까지 했다면? 회사생활하는 대현이 구직하던 지영과 대비되는 순간, 비중을 키워서 이해 받을만하게 만들고자 했던 캐릭터가 무너진다. 늘어난 그의 비중으로 인해 한국에서 가족을 만든 부부의 고충에 관한 텍스트가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판은 끝내 배려를 가장한 고까움을 드러내며 원작의 저차원적인 전개방식에 잠식당한다. (이는 원작에서 스토킹 당한 김지영을 구해준 아주머니가 '그래도 좋은 남자들이 더 많다' 는 식으로 위로한 대목을 연상케 한다. 혹 다른 성별에 대한 편파적인 묘사로 비판 받을까봐 면피 차원에서 집어넣은 듯한 문장 말이다.) 영화판만 보면 대현은 별 노력도 안 하고 돈 버는 것 같다. 영화판이 보여주는 남성인식은 이 정도다. 그나마 원작에 비하면 낫다는 점이 함정이다.
그리고 지영이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쏟은 후 생면부지의 남녀 회사원들로부터 맘충 소리를 듣고 그들에게 대항하는 에피소드가 삽입되면서 영화판은 한계의 화룡점정을 찍는다. 해당 장면은 영화판이 지영이 정신적으로 회복하는 서사를 만드는 설정으로 추가된 에피소드다. 공원 벤치에서 아이를 돌보며 커피를 마시다 처음 맘충 소리를 듣는 장면에 이어 두번째. 사실 첫번째도 다소 부자연스러운 상황이지만, 두번째는 더 심하다. 지영이 커피를 받아들다 쏟는 바람에 사과하고 직접 수습한다. 맘충 소리 들을 이유가 전혀 없는 순간이다. 하지만 영화판은 주변에 있는 회사원들을 통해 그녀를 기어이 험담 대상으로 올린다. 김지영에게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려 한 것 같지만, 이는 그저 온라인에 적히는 뇌내 망상을 또 하나의 현실 속 성차별 사례화 하려는 노력처럼 보인다. 예시가 되기 위해 김지영 캐릭터는 원작에 이어 영화에서도 착취당하는 순간을 겪는다.
영화판 <82년생 김지영>은 포기했어야 할 원작을 어떻게든 말 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점에서 이미 그 자장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인증한다. 좀 안타까운 부분은 어느 시점까지는 분명 영화판이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끝내 원작과 비슷한 수준으로 머물기를 자처한 이유가 뭘까. 보증된 화제성을 그대로 끌고 가자는 데뷔감독과 영화사 간의 타협이었겠지만 아마 내 상상이리라. 덕분에 <82년생 김지영>은 원작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신파가 첨가된 그저 그런 젠더 관련 교육영상... 작품 정도로 여길 수 있다. 전반부가 아니었다면 '영상' 까지만 언급하고 말았겠지. 원작을 읽었다면 영화판은 나름의 장점이 보인다. 돼지에게 립스틱도 발라주고 나름대로 메이크업도 해서 어느 정도 볼만한 돼지로 만들려고 한 노력이 보인다. 물론 돼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p.s.
1)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소망했던 것이 있었다. 기왕 영화화 할거면 아예 본격 오컬트 호러물을 시도해볼 생각은 없었을까. 나는 항상 이 작품을 호러로 영화화 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사와무라 이치의 소설 <보기왕이 온다>, 그리고 그 소설을 영화화한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온다> 를 봤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2)
정유미는 캐스팅 됐을 당시 김지영을 연기하기에는 지나치게 외모가 뛰어나다는 (그러니 이국주에게 배역을 맡겼어야 한다는 식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스타성보다 연기에 집중하려는 준수한 외모의 배우들이 숙명적으로 겪는 일이다. 정유미는 평범하게 보이는 연기를 누구보다 잘 하는 장점이 있는데, 그래서 김지영 역에 딱 알맞다. 작품과는 별개로 정유미 연기는 필모에서도 많이 거론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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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분위기에 이런 리뷰 쓰기 쉽지 않으셨을텐데...
필력 엄청나시네요 ㄷㄷ
영화판에서 확실히 바뀐 대현이라는 캐릭터조차 원작처럼 ‘한남’이라고 까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이동진 평론가님이 작정하고 촌철살인적인 평론을 남기셨던데, 멘탈 대단하시다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