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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항거: 유관순 이야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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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10 20:29:22

 

잔다르크의 수난을 찍고픈

마음은 잘 알겠다



[스포일러 있음] 

<사바하>를 본 날 연이어 <항거: 유관순 이야기> 를 봤다. 1919년 4월 1일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된 유관순 열사 (고아성) 이야기다. 그녀가 들어선 감방에는 만세운동 주도를 하거나 참여하다 체포된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 중에는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향화 (김새벽이 연기했으며 실존인물의 사망일자는 알 수 없음.), 유관순의 이화학당 선배이자 개성 시위를 이끈 권애라 (김예은이 연기했으며 실존인물은 1973년에 사망.), 평안도 출신 다방 여급 이옥이 (정하담이 연기했으며 작품을 위해 창작된 인물) 도 있다. 작품은 서대문 감옥 8호실에서 만난 이들이 좁은 감옥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밀실과 광장 속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담고자 노력한다.



조민호 감독. 그에게 있어 영광의 순간은 과연 언제였나. <10억> 제작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그게 아니라면 생각나는 거라곤 장혁과 이범수가 주연했고, 감독의 데뷔작인 <정글쥬스> 속 풍차돌리기 장면 뿐이다. 풍차돌리기하면 당연히 홍콩영화계의 역작 <옥보단> 을 떠올려야 겠지만 그 작품을 직접 봤다는 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져만 갔다. 기억을 통해 전해지거나, 온라인에서 구할 수 있는 몇초짜리 짤방으로 작품을 봤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현재 1200원으로 VOD가 서비스 되는 중이지만 과연 몇 사람이나 그 돈 주고 사서 봤을까.)  한국에서는 자연스레 <정글쥬스> 와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 이 풍차돌리기 왕좌를 놓고 결투를 벌였다. 그러나 그것 하나로 한정 짓기에는 <생활의 발견> 이 너무 많은 영화적 매력을 지닌 작품이었다. 최종 승자는 <정글쥬스>. 조민호 감독 마음은 어떨지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작품에서 볼만한 건 풍차돌리기 뿐이라서다. 이후 보여준 영화적 행보에서도 그만큼 인상적인 순간을 구현하지 못했다.



*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원래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 처럼 특정 부분에만 색을 넣으려고 했던게 아닐까 싶다. *



3.1절 임박해서 개봉한 <항거: 유관순 이야기> 가 감독에게 새로운 영광이 될 수 있을까. 우선적으로는 단점이 먼저 보인다. 작품은 흑백으로 찍혔지만 이준익 감독의 <동주> 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함인지, 단지 영향 받았다는 소리를 피하고 싶었는지 컬러도 활용한다. 흑백으로 진행되는 감옥 이야기와 달리, 컬러로 찍힌 플래시백은 유관순이 보낸 평화로운 일상과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평화로움과 무자비함을 시각적으로 생생히 살리려는 의도로 컬러를 택한 듯 하지만, 오히려 저예산으로 찍힌 사극의 외적인 비루함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그리 많지 않은 엑스트라들과 얼마 되지 않는 공간을 이용해 어떻게든 '군중이 참여한 만세 운동' 처럼 부풀려 찍으려는 카메라워크와 총체적인 연출은 보기에 많이 애처롭다. 그렇다고 유관순 가족의 일상묘사를 컬러로 찍었다고 해서 딱히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작품 속 컬러 플래시백이 보여주는 장점은 딱 두 가지다. 유관순이 오빠 유우석이 가져다 준 목판 덕분에 태극기를 복사할 수 있게되어 색을 칠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태극의 붉은색과 파란색이 눈에 잘 띈다는 점. 유관순 부모가 아우내 장터에서 죽어갈 때 몸에서 흘리는 피를 컬러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작품이 색을 다루는 연출은 단순하고 얕다. 



유관순 역의 고아성 배우를 제외한 주역들 역시 전체적으로 연기가 부족해 보인다. 가령 작품에서 일본인 교도소 소장을 연기하는 이영석 배우는 헌병 보조원인 니시다 / 정춘영 (작품에서는 자격지심으로 폭력을 휘두르다시피 하지만, 실제로는 유관순을 적극적으로 고문한 자였다.) 역을 연기한 류경수 배우 다음으로 일본어를 많이 쓴다. 그런데 소화해야 할 외국어 대사 양이 버거웠는지 끝내 연기력으로 극복해내지 못했다. 일본어에 무지한 사람이 봐도 연기 난조가 확연히 보일 정도다. 최동훈 감독의 <암살> 에서 데라우치 총독 역을 꽤 능청스럽게 연기한게 인상에 남아서였는지 더 의외였다. 그 때는 등장 분량이 적어서 잘했던 걸까? 정하담과 김새벽 배우의 경우에는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이야기에 출연할 때 행해지는 관성적인 연기에서 벗어나고자 나름 고민과 실험을 담아낸 것 같다. 그러나 결과물을 보면 과연 관성이 나쁘기만한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정하담 배우의 평안도 사람 연기는 신상옥 감독작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속 옥희의 하위호환 재탕을 보는 듯하다. 김새벽 배우는 다른 독립영화들에서도 볼 수 있었던 '무덤덤한 김새벽스러운 연기' 를 한다. 유관순 다음으로 비중이 큰 역이지만 마치 30분 전에 다른 독립영화 찍고 바로 넘어온 듯한 무성의함을 보이는데, '운동가'나  '운동' 이라는 의도 뒤에 숨어 그나마 배우 연기로 체면치레 되는 수준이다.



이외에도 작품은 남성 캐릭터 한 명을 좀 우둔하거나 철 없는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우둔하거나 철 없는 남성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묘사되는 남성이 유관순 오빠인 유우석이라는 점이다. 플래시백 장면에서 유관순에게 한 소리 듣거나 서로 티격태격 하는 장면들은 흔히 볼 수 있는 남매 모습이고, 감옥에서 큰 존재감 없이 동생을 걱정하는 정도로만 등장하는 부분 역시 주역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유우석은 치밀하게 독립운동을 계획했고, 출소 후에도 끊임없이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근성을 보여준 사람이다. 단지 동생인 유관순의 업적과 존재감에 비해 가려진 감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유우석을 그저 유관순의 '오빠' 로서만 다룰 뿐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는 데에는 소홀하다. 출소 후, 다른 사람들과 합심해서 출근하는 니시다를 린치하는 정도만 보여줄 뿐이다. 유관순의 가족인데 어째 인물 자체의 깊이는 1인자 밑에 있는 행동대장 수준정도로 얕게 보인다. 꽤나 초라한 캐릭터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주역 중에서는 권애라 역의 김예은 배우 정도가 진지하게 연기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정도다. 작품이 역사 속에서 주목받지 않은 여성 운동가들의 배포 있는 모습을 부각하겠다는 의도는 좋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남성 운동가를 얄팍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는 작품을 보는 동안 계속 의문으로 남았다. 이야기 자체도 평범한 수준이라, 요즘 이슈와 소재에 적당히 부응하는 식으로 묻어가려 하지 않았나 생각해보게 된다.



하지만 그런 의심에도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그나마 괜찮은 작품' 이라는 인상으로 남았다. 이는 개봉 당시 극장 경쟁작이 <자전차왕 엄복동> 인 이유도 있겠지만, 고아성 배우의 열연으로 작품이 지닌 여러 단점들을 상쇄시킨 덕이 무엇보다 크다. 어떻게든 작품을 끝까지 보게 하는 원동력이 그녀에게 있다. 작품이 실제로 그녀에게 주목할 수 밖에 없도록 클로즈업 위주로 촬영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것이 의도라기 보다는 여러 현실적인 제약이 고려되어 '그렇게 찍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인물 위주 촬영이 될 수 밖에 없게끔 공간과 동선이 얼마 확보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이유도 있고, 12세 관람가라서 잔혹한 고문장면들을 다 보여줄 수 없을테니 유관순의 표정변화로 고통을 대신 표현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12세 관람가 판정을 받았음에도 작품의 고문 장면은 생각보다 세다.) 컬러 플래시백 장면들보다는 낫다고 여겼지만, 어떤 진지한 의도를 가지고 이런 촬영방식을 고수했다고 보이지는 않았다.



이 생각을 그만두게 된 이유는, 한 장면이 내 시선을 멈추게 하고 일순간 작품이 좀 달리 보이게 해서였다. 일본 경찰들이 유관순을 고문하려고 벽관에 가두는 장면이 있다. 비좁은 공간에서 몇 날 며칠 서 있게만 하는 고문기구인 벽관은 밖에서 보면 사람 얼굴만 보이게끔 네모난 창이 만들어져 있다. 사람 얼굴만 보이는 구조라 카메라도 고아성 배우의 얼굴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클로즈 업 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고아성 배우의 얼굴이 마치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의 <잔 다르크의 수난> 속 마리아 팔코네티처럼 보였다. 오버라고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랬다. <잔 다르크의 수난>은 촬영 당시 나름대로 독특한 디자인을 갖춘 인상적인 세트를 지었지만 이를 배제한 바 있다. 작품은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을 클로즈 업 하는데만 최선을 다했는데, 잔 다르크 역을 맡은 마리아 팔코네티 배우의 클로즈업에서 거의 영혼을 포착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 <항거: 유관순 이야기> 도 <잔 다르크의 수난> 같다는 생각을 했으니 '고아성의 영혼' 을 담아냈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그 정도는 아니다. 그 작품 따라가려면 백년은 멀었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카메라로 고아성을 담아내려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의 태도에서 분명 진심은 전달된다는 점이다. 최소한 작품이 유관순을 다루려는 태도에 대해서는 3.1절 임박한 개봉일에서 느낀 첫인상처럼 얄팍하게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 단순한 신성화를 넘어 신체 / 정신적 학대를 당하는 와중에도 쓰러지지 않는 독립운동가의 결사적인 영혼을 찍으려는 태도가 보인다. 단순히 배우 연기에 묻어가려 들지 않고, 고아성이란 배우가 내면으로부터 유관순이라는 인물을 끌어내려는 시도를 담아내는데 일조하려고 노력한다. 고문 장면에서 그녀가 악다구니를 쓰는 순간만 보여줬다면 이만큼 놀랍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에는 따뜻한 햇볕을 쬐며 홀로 감옥에 누워있을 때 "그럼 누가 합니까?" 라고 나지막하게 답하거나, 심한 고문을 당해 고독하게 홀로 앉아있을 때 음부에서 핏물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 보는 유관순의 모습이 있다. 작품은 밀실에서의 독립운동가들을 담고자 했다. 여기서 유관순은 의도로서 존재하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데 성공한다. 생각해보면 실제 유관순 열사가 순국했을 때가 18세였다. 그 나이를 잊게 되는 경우가 많다. 고아성의 목소리를 통해 유관순의 나이는 다시 한 번 체감된다. 그리고 그녀가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이 맷집이 좋아서 고문을 견뎌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분명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견딜 수 없을 일을 홀로 감내 중이다. 그래서 항상 놀라게 되는 것이 이 엄청난 고행길을 걸어온 열사가 10대라는 점에서다. 일제강점기와 지금의 10대가 동일시 될 수는 없겠지만, 도대체 어떻게 이 정도까지 행동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불가해한 의문이 있다. 이를 고아성 배우가 훌륭하게 메운다. 고아성의 거대한 눈에서 안광이 비춰질 때, 나이와 상관없이 '이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는 절대적인 느낌이 든다. 맷돌을 돌리는 장면에서 잔근육을 보여줄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던 엄복동 따위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절대성과 초월성. 고아성은 그것을 표현해낸다. 그리고 작품은 고아성의 명연만큼은 온전히 담아내는데 성공한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의외의 결과물이다. 풍차돌리기나 잘 찍는다고 생각했던 감독은 그래도 <10억> 이후 10년 세월을 마냥 날로 먹지는 않았음을 보여줬다. 10년 묵은 것치고는 좀 더 분발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도 있어서 좋은 작품이라 말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전보다는 조금 더 조민호 감독의 차기작을 긍정적으로 기대하게 됐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지금은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연기자로서 고아성의 정점을 담아낸 작품이라고 해두겠다.



p.s.


1) 연기 잘하고 못하고 여부와 상관없이 '고아성의 영혼' 을 담아낸 작품은 아직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를 뛰어넘는 게 없나보다. 거기서 고아성 배우 담배 피우는 장면은 정말.. 카메라가 인간 고아성의 영혼을 담아낸 느낌이다.



2) 쓰다 보니 정작 남자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정춘영 / 니시다를 언급하는 걸 잊어버렸다. 그닥 인상깊진 않았지만 한국 배우들의 어설픈, 그런데 작품에서는 유창한 것처럼 묘사되는 일본어 연기를 하지 않아서 그 점은 좋았다. 애초에 매국노 캐릭터에 '일본어를 잘 하려고 노력한다' 는 컨셉이라 어설프게 말하는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보였다.

 

 

3) 근데 위에서 <옥보단> 풍차돌리기 얘기해놓고, 내가 그 작품을 제대로 본 건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서금강이 풍차돌리기 하는 장면은 <만다린: 만청십대혹형> 에서도 봤기 때문이다. 위에선 사람들이 VOD로 안 본다드니 하면서 빈정댔는데, 다 써놓고 생각해보니 나도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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