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게] 최악의 캐디 이야기
얼마전 일입니다.
이직한 회사에서 저를 환영하는 의미에서 골프 라운딩을 잡습니다.
사장, 부사장, 상무 그리고 저.
골프라는 운동의 특성이, 긴 시간 함께 하다 보니까 골프장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그 사람의 모습이 있더군요. 그 사람의 성격, 인성, 관심사, 습관... 이런게 다 보입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습니다. 일터에서 모습 만큼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쟨 구력이 6년인데 어째 저것 밖에 못하나? 이런 얘기를 들을까봐서요.
난생 처음으로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그날 만큼은 소기의 성과가 있긴 했습니다. 제 수준에서는 내용도 스코어도 괜찮았거든요. 일파만파 없고 멀리건 없고 컨시드 정확하게 하고... 이 분들 골프에 꽤 진심이십니다.
사장님은 안정적인 보기 플레이어,
부사장님도 비슷한 수준이라 했는데 그날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부사장님이 구력 18년만에 첫 싱글을 노리게 됩니다.
한편, 상무님은 골프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셔서 스코어 자체가 의미 없습니다.
홀 하나 건너 오비가 나고, 페어웨이에서도 뒷땅, 탑볼이 이어집니다. 볼 찾으러 다니시느라 힘듭니다.
캐디님은 시작부터 끝까지 카트 반경 5미터를 잘 안 벗어나는 스타일입니다. 물론 그래서는 경기 운영이 안되니 과장이긴 합니다만, 마치 정말 그런 것 처럼 보입니다. 코스 설명도 적극적이지 않고, 볼 놓는 것도 무성의 합니다. 무엇보다 말투가 시니컬합니다. 뭐 사실 말이 별로 없습니다. 뭐 백인백색 성격이 다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대로 잘치고 있었고, 부사장님이 싱글을 향해 달려가면서, 분위기가 좋아집니다.
18홀 파5입니다. 부사장님이 더블보기만하면 79타로 싱글을 찍을 수 있는 마지막 홀.
캐디는 물-기름처럼 대화에도 끼지 않는 타입이라 우리끼리 시끌 벅적합니다.
저는 나름 잘 쳤지만 부사장님의 빛나는 플레이로 제가 잘치고 못치는 것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부사장님이 첫 타자로 드라이버를 잘 보내셨고, 마지막으로 상무님이 드라이버를 치는데 또 오비가 납니다.
말 수 없고 목소리가 안으로 먹어들어가던 캐디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립니다. 아니 이번에는 까랑까랑합니다.
'아니, 고객님, 오비가 나는데 왜 뽀올~ 하고 안외치세요?'
순간 제가 맞게 들은 건지 놀랍니다. 캐디가 불친절한 경우는 봤어도 고객에게 짜증을 내며 훈계하는 경우는 한번도 본 적이 었거든요. 분명히 캐디가 상무님께 따지듯이 묻습니다. 시비 가리자는 말투입니다.
초보인 상무님은 당황하십니다.
'아 예, 그게 제가 잘... 초보라 잘 몰랐습니다. 아... 외쳐야 하는구나. 알... 알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납니다.
저도 어지간하면 화를 내거나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지 않는 성격입니다.
확 뒤짚어 엎을까 순간 고민합니다.
'고객님은 오비가 많이 나시니까, 그럴 때는 뽈~ 하고 크게 외쳐 주시는게 좋아요. 제가 하겠지만 그래도 함께 해주는게 낫거든요'
이렇게만 말했어도 맞는 말이라고 동의 했을 것 같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잖아요?
근데 순하디 순한 상무님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더 열받습니다.
화를 낼까 말까 고민하며 사장님과 부사장님을 번갈아 보는데, 두분 다 가만히 계십니다.
부사장님 얼굴이 보입니다. 싱글을 앞두고 있는 상황 ㅎㅎㅎ
이런 젠장...
거기서 제가 판을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 사장님도 가만 계십니다.
꾹 참습니다.
사장님과 부사장님이 마지막이니 멀리건 한번 더 쓰라고 상무님을 독려합니다.
상무님이 작정하고 휘두릅니다. 낮고 빠르게 왼쪽 홀로 날아갑니다. 생긴지 얼마 안된 구장이어서 홀과 홀이 붙어 있습니다. 하필 그 볼이 옆 홀에서 반대로 진행중인 플레이어 얼굴에 맞습니다.
무전이 날라와서 알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달려갑니다. 다행히 직구로 맞은 건 아니고, 한번 바운드 된 볼이 오른쪽 눈 아래 광대에 맞았습니다. 이미 권투선수처럼 얼굴이 부어 있습니다.
이 사건도 우여곡절 끝에 잘 수습했지만 상무님은 멘탈이 완전히 나갔습니다. 상무님은 홀 아웃 하십니다.
남은 세명, 파5 마지막 홀 그린위.
캐디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이 지연되서요 알아서 마무리 하고 와주세요. 저는 정리 좀 먼저 할게요. '
사장님이 꾹 참는게 보입니다. 부사장님은 포온 하시고는 쓰리 펏 하십니다.
더블보기를 하시면서 79타 싱글을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기쁜 일에 축하를 해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부사장님이 캐디에게 5만원을 더 얹어줍니다. 이미 전반에 버디를 여러차례 잡았어서 캐디 분은 쏠쏠 했을 라운딩입니다. 그러고보니 저도 후반에 한장 넘겼습니다. 얄밉습니다.
백을 싣고 클럽하우스에 걸어가며 제가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내자, 부사장님이 한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좋은 일이 생겼는데 그러면 할 건 해야한다. 따져가며 줄거 안줄거를 가리는 것은 아닌것 같다. 그냥 줄 것은 주는게 내 맘이 편한 법이고 좋은 일에 빛이 나는 법이다. '
어른답게 맞는 말씀입니다.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저는 그 캐디가 너무 밉습니다. 골프를 친 이래 가장 최악의 캐디로 꼽습니다.
상무님은 그날 축하 뒷풀이에서 술을 못드셨습니다.
스트레스와 두통으로 인해 약을 드셔야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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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제가 다 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