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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대]  [특집] 불타는 록키의 연대기 (1) -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슬라이의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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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3-20 01:41:24

글 | 김정대(antoine@unitel.co.kr)


※ 편집자 주 : 본 컬럼은 김정대님이 2006년 12월에 출시된 코드 1번 <록키> Collector's Edition DVD 리뷰에 포함되어 있는 영화 소개글의 재편집본입니다. 글을 읽다 보면 영화 <록키>와 같이 세월을 뛰어 넘는 전율과 환희, 뭉클한 감동을 느낄 수 있어, 혹시 오늘을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다시 소개합니다.

 

불타는 록키의 연대기 #1

 

2006년 12월에 북미에서 처음 공개된 <록키 발보아>는 예상을 뛰어넘는 호평을 이끌어내며 영화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평론가들은 ‘30년 묵은’ 뻔한 아메리칸 드림 이야기가 21세기에도 여전히 관객들에게 - 심지어 신세대 관객들에게도! - 어필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경악했고, 특히 7-80년대에 많은 좌절을 경험했던 중장년 층 세대들은 ‘완전히 망가진 것으로’ 여겨졌던 젊은 시절의 은막의 우상이 환갑이 되어 찬란히 부활하는 기적적인 광경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록키> 시리즈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가지는 호소력은 단순히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테스토스테론적 미학 에너지’나 ‘사정없이 아드레날린 펌프질’을 해대는 다이내믹한 촬영과 편집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록키> 시리즈는 영화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솔직한’ 휴먼 드라마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간 많은 언론매체는 “<록키>는 실베스터 스탤론 자신의 이야기”라고 보도해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 팬들(특히 국내의 팬들)은 스탤론의 삶이 정확히 어떠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이런 언론의 보도는 피상적인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컬트필’에서는 앞으로 2회에 걸쳐서 <록키>를 완성하기까지 스탤론의 드라마틱한 삶을 재조명한다. 본문에서는 그동안 한 두 마디의 소문으로만 듣던 스탤론의 불운한 어린 시절, 그가 겪었던 수많은 좌절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딛고 그가 <록키>로 우뚝 서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상세히 묘사될 것이다. ‘손수건’을 미리 준비하시고 이 눈물겨운 이야기를 정독해 주시길!


1. The Beginning


슬라이(Sly, 실베스터 스탤론의 별명. 앞으로 본문에서는 스탤론을 ‘슬라이’로 언급한다)의 아버지 프랭크 스탤론은 시칠리아 출신의 이민자로, 매우 고집이 세고 독단적인 ‘가부장적인 인물’의 전형이었다. 적어도 슬라이의 집안에서 프랭크 스탤론의 말은 곧 ‘법’이었고, 이런 프랭크의 성격은 민감하고 반항적인 슬라이의 그것과는 심한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훗날 슬라이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부모가 원치 않았던 아이, 학대받는 아이의 전형”이라고 묘사했는데, 그 이유는 5할 이상이 아버지 프랭크 때문이었다. 프랭크는 제대 후 뉴욕에서 이발 기술을 배우게 되는데, 이 때 - 장차 슬라이의 어머니가 될 - 재클린 라보피시를 만나게 된다. 프랭크와 재클린은 곧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재클린 역시 ‘만만치 않게 고집이 세고 성격이 독특한’ 여성이었기에 두 사람은 수시로 싸움을 벌이곤 했다. (프랭크는 - 역시 가부장적이었던 그의 아버지의 영향으로 - 결혼 직후부터 자신이 가정의 ‘왕’으로 군림하기를 원했지만, 재클린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성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 그 악명 높은 - 뉴욕의 헬스 키친의 중심부에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 곳은 뉴욕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밀집해서 살았던 지구로,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은 범죄자가 되어 전기의자에 앉게 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프랭크와 재클린 부부가 살았던 곳은 온수도 나오지 않는 허름한 아파트였다. 1945년, 재클린이 슬라이를 임신했을 때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어야 했는데, 이 때문에 가세는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춘 병원에 갈 여유가 없었던 프랭크 부부는 1946년 7월 6일, 뉴욕 뒷골목에 있는 병원의 자선병동에서 슬라이를 낳아야 했다. 슬라이가 태어났을 때, 두 가지의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재클린은 자신의 첫 번째 아이의 이름을 ‘타이론’ - 유명한 배우 타이론 파워의 이름을 따서 - 으로 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재클린은 점성술과 운명을 철저히 신봉하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아들의 이름에 각별한 관심을 쏟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프랭크는 그녀가 마취약에 취해 잠들어 있을 때, 독단적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가문의 전통적 이름을 따서 아들을 ‘Sylvester Gardenzio Stallone'이라 명명했다. 재클린은 남편이 자신과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아들의 이름을 ‘실베스터’라고 지은 데 대해 크게 분노했지만, 이미 이 때 프랭크는 ’실베스터 스탤론‘이라는 이름이 적혀진 출생 신고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슬라이의 인생은 이 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실베스터’라는 이름은 미국인들에게는 어감 상 (안 좋은 쪽으로) 매우 독특한 것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슬라이는 동료 아이들에게서 많은 놀림을 당했다. 기실, ‘실베스터’라는 이름은 당시 꼬마들에게도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었다. 워너 브라더스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루니 툰’에 나오는 유명한 고양이의 이름이 바로 실베스터였기 때문이다. 허구한 날 노란 카나리아 ‘트위티’를 뒤쫓다가 호되게 당하곤 하는 이 고양이는 어찌 보면 <톰과 제리>에서 죽도록 고생만 하는 톰보다도 더 가련한(?) 캐릭터다. 애니메이션에서 이 고양이가 겪는 혹독한(?) 시련은 슬라이의 어린 시절의 그것을 간접적으로 예언하는 것이었다.


☞ 실베스터와 트위티


하지만 이 작명사건은 그 다음에 일어날 해프닝에 비하면 사소한 익살극에 불과했다. 분만 후 슬라이를 집으로 데려온 프랭크와 재클린은 아기의 왼쪽 눈이 비정상적으로 축 쳐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병원으로 다시 달려간 그들은 정말로 황당한 말을 들었다. 당시 자선병동에서 가난한 이들을 치료한 의사들 중에는 충분한 경험을 쌓지 못한 ‘아마추어’들이 많았는데, 하필이면 슬라이를 받은 의사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병원 측의 설명에 의하면, 슬라이는 겸자분만으로 태어났는데 분만 당시 실수로 슬라이의 안면 신경 중 일부가 끊어져버려서 그의 안면 중 왼쪽 편 눈 아래가 마비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슬라이는 왼쪽 뺨과 입술을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고, 치명적인 발음 장애까지 가지게 됐다. 프랭크와 재클린은 슬라이의 이 장애가 ‘고칠 수 없는 영구적인 것’임을 안 뒤 크게 낙담했다. 향후 슬라이가 우스꽝스러운 얼굴 생김새와 알아듣기 힘든 발음 때문에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게 될 것은 이미 이 때 예견됐다.


☞ 스탤론의 안면 왼쪽을 자세히 보면 지금도 장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슬라이의 유일한 친구는 ‘고독’이었다. 바보 같은 말투와 이상한 얼굴 생김새, 기묘한 이름 때문에 슬라이는 학교에서 급우들에게 늘 놀림감이 됐고(실제로 급우들은 슬라이를 ‘고양이 실베스터’라고 놀려댔다), 친구도 거의 사귈 수 없었다. 슬라이의 성격은 자연스레 폐쇄적인 것이 돼 갔는데, 그의 아버지 프랭크는 아들의 이런 독특한 태도를 ‘자신에게 반항하는 것’이라고 여겨 그를 더욱 모질게 다뤘다. 결국 슬라이가 억눌린 욕구를 표출시키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폭력적이고 반항적인 아이가 되는 것’이었다. 한편, 슬라이는 친구가 거의 없었던 탓에 어린 시절부터 혼자 공상하는 것을 즐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훗날 그가 ‘각본가’로 성공하게 되는 원천이 되기도 했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위안거리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슬라이는 자연히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욕구불만을 해소하곤 했다. 그는 이웃집의 자동차를 훼손하며 돌아다니기도 하고, 툭 하면 싸움을 일으켜 부모를 곤경에 처하게 하곤 했다. 이웃집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지켜보며 슬라이가 머지않아 철창신세를 지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슬라이의 가족은 얼마 후 매릴랜드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다행스럽게도 이후 그들의 재정상태는 점점 나아졌다. 프랭크는 자신만의 이발소를 운영하게 됐으며, 머지않아 체인점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생활환경의 변화도 슬라이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뉴욕에서나, 매릴랜드에서나 슬라이는 늘 또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존재였고 이런 주위의 박대가 계속되자 그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더욱 깊어만 갔다. 슬라이는 자신의 발음 장애에 대해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고 이로 인해 그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세상과 고립된 존재가 돼갔다.



☞ 열 살 때의 스탤론의 모습


외롭게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던 슬라이는 어느 순간부터 동화나 판타지 속의 영웅을 동경하며 그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간절히 꿈꾸게 된다. 그는 이런 바람을 단순한 ‘공상’의 틀에 가두는 대신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기도 했다. 어린 시절, 슬라이의 우상은 ‘수퍼보이’(유년기의 수퍼맨)였다. 수퍼보이를 너무나 숭배했던 슬라이는 8살 때는 직접 자신만의 수퍼 보이 의상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그가 고안해낸 수퍼보이 의상의 구성은 이러했다: 싸구려 레오타드와 빨간 팬티, S자를 새긴 스웨터, 그리고 아버지의 이발소에서 훔친 이발용 보자기. 그는 이 수퍼보이 복장을 속에 입은 채로 겉옷을 입고 등교를 하곤 했다. 어느 날, 슬라이는 한 급우에게 자신의 비밀복장에 대해 털어놓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물론 그 급우는 곧장 담임 선생님에게 달려가서 슬라이의 기행을 고자질했다. 담임 교사는 슬라이에게 급우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도록 지시했고, 그의 비밀의상을 본 급우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슬라이는 이 때문에 오랫동안 수치심에 모든 이들을 향해 이를 갈아야 했다. 어린 시절 겪은 이런 모멸감이 슬라이의 ‘반항적 기질’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이다.



슬라이는 학교에서 소문난 문제아이며 말썽꾸러기였기 때문에, 그의 부모는 수도 없이 학교로 불려갔다. 프랭크와 재클린이 보기에도 슬라이는 - 담임 교사의 말처럼 - 공부보다는 ‘창의적인 장난’에 늘 더 관심을 두는 것 같았다. 끊임없는 기행과 장난으로 인해 슬라이는 수없이 학교에서 벌을 받았고, 급기야 퇴학까지 당해 몇 번이나 학교를 옮겨야 했다. 프랭크와 재클린은 자신의 아들이 ‘정상적인 아이’로 클 수 있도록 갖은 묘안을 짜 내 봤으나 그 중 어떤 것도 효과가 없었다. 우습게도 슬라이의 품행이 이렇게 괴팍하게 된 데에는 (지금은 슬라이와 매우 절친하게 지내는) 그의 동생 프랭크 스탤론 주니어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슬라이와는 달리 프랭크 주니어(슬라이와는 네 살 차이)는 어떠한 육체적 장애도 없는 건강한 아이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총명한 아이이기도 했다.


프랭크와 재클린은 자연스럽게 둘째 아들 프랭크 주니어를 편애하게 됐고, 슬라이는 성장과정 내내 동생과 비교를 당해야 했다. 어떤 어려운 음악 레슨도 척척 소화해내는 동생과는 달리, 슬라이는 초보 단계의 탭 댄스 교습도, 피아노 레슨도 전혀 감당해내지 못했다. (재클린은 젊은 시절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여러 악조건으로 인해 이 꿈을 접어야 했다. 그녀가 자식들의 음악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데에는 이런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재클린은 슬라이에게 강제로 색소폰 교습을 시키기도 했는데, 이것을 통해 아들의 마비된 안면 근육을 풀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음악에는 재능도, 흥미도 없었던 슬라이에게 이 모든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 실베스터 스탤론의 동생 프랭크 스탤론 주니어. 그는 훗날 유명한 뮤지션이 됐다.

 

 

1957년, 슬라이의 향후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프랭크와 재클린이 마침내 이혼을 한 것이다. 결별 후 프랭크는 매릴랜드에 계속 머물렀고, 재클린은 필라델피아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두 사람은 슬라이와 프랭크 주니어를 1년 단위로 번갈아서 맡아 기르기로 합의했는데, 이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전학이 잦았던) 슬라이는 ‘정기적으로’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다. 이런 철새 생활은 슬라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계속됐는데, 덕분에 슬라이는 유년기 내내 ‘가정의 따뜻함’과 ‘훈훈한 우정’ 따위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 그는 '트러블메이커‘라는 꼬리표를 늘 달고 다녔으며, 기물을 파괴하고(그는 자신이 ’군인‘이고 이웃집의 자동차를 ‘적군 탱크’라고 상상하며 ‘탱크를 향해 벽돌 폭탄’을 던지는 등 1인 전쟁놀이를 즐기곤 했다. 훗날 ‘람보’가 될 기질은 이미 이때부터 엿보인 셈이다.) 싸움을 일으키는 등 예의 기행을 계속 이어갔다. 누가 봐도 슬라이는 머지않아 학교가 아닌 소년원으로 가게 될 것으로 보였다. 만일 이 시기에 재클린마저 슬라이를 ‘포기’했다면 그의 인생은 십중팔구 철창 안에서 마감됐을 것이다.



재클린은 이혼 후 거주지인 필라델피아에서 한 피자 제조업자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된다. 재클린의 새 남편은 그녀가 자신만의 새로운 커리어를 쌓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재클린은 헬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남편의 도움에 힘입어 그녀는 필라델피아에 체육관을 하나 지어서 운영하게 된다. 이것은 슬라이의 인생에서 (거의 최초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건이었다. 재클린은 슬라이에게 ‘건강한 마음은 건강한 육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주기적으로 주입시켰고, 이에 따라 슬라이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육체를 가꾸는 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욕구불만’의 화신이었던 슬라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스트레스 해소 도구가 되기도 했다. 슬라이는 이 시절에 은막을 누비던 남성 영웅들에게 푹 빠져있었는데, 당시 그가 특히 숭배했던 인물은 이탈리아 에픽극 <헤라클레스>의 주인공 스티브 리브스였다. ‘원조 근육질 스타’라 할 수 있는 리브스의 울긋불긋한 몸, 그리고 은막에서의 그의 용감무쌍한 활약상은 12세의 ‘왕따 소년’ 슬라이에게는 경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리브스와 같은 훌륭한 육체를 가지기를 갈망한 슬라이는 보디빌딩을 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슬라이는 ‘약골’에 가까웠다.) 리브스의 영화를 본 뒤 슬라이는 곧장 동네 공터로 달려가서 시멘트 블록, 자동차 차축 등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을 이용해 체력 단련을 하기 시작했다.


건강에 대한 그의 굳은 결심을 ‘일회성’이 아닌 평생의 것으로 만든 이는 바로 그의 어머니 재클린이었다. 운 좋게도 이 때 재클린은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었데, ‘대책 없는 문제아’였던 맏아들이 갑자기 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그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는 슬라이가 태어난 후 처음으로 내린 ‘건설적인’ 결정이었다. 이후 슬라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체육관에 들러 비지땀을 흘리며 몸을 가꾸었는데, 이것은 향후 그의 인생에서 큰 자산이 됐다. 한편, 직설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아버지 프랭크 역시 맏아들의 이 결정에 ‘나름대로의 격려’를 보냈다. 슬라이는 당시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내뱉은 말을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너는 어차피 좋은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으니, 몸이라도 제대로 가꾸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이것은 슬라이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슬라이의 향후 인생은 아버지의 이 발언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스탤론의 어린 시절 우상 스티브 리브스


하지만 슬라이에게는 보디빌딩보다 더 중요한 성장기의 과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학교를 졸업하는 것’이었다. 슬라이는 매릴랜드와 필라델피아의 카톨릭 학교와 공립학교를 거의 모두 전전하다시피 하며 유년기를 보냈는데, 나중에는 더 이상 옮길 학교가 없을 지경이 됐다. 재클린은 어떻게 해서든 맏아들에게 고등학교 졸업장을 안겨주고 대학으로 진학시키고 싶었지만, 슬라이의 학업 성적이 워낙 불량한데다가 퇴학 경력마저 화려하기 그지없어서 그를 받아줄 학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슬라이를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재클린은 결국 그를 특수 사립학교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재클린이 이런 결심을 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시 재클린은 새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토니 앤)을 하나 낳게 되는데, 이로 인해 그녀는 슬라이에게만 모든 관심을 쏟아 부을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재클린은 수소문 끝에 슬라이를 제대로 돌봐줄 만한 특수 사립학교를 찾아냈다. 바로 매너 고등학교(Manor Hight School)이었다. 1951년에 설립된 이 특수 사립학교는 정서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특별히 고안된 교수법으로 지도해 ‘정상아’로 길러내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이 곳은 슬라이에게는 문제아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다.


재클린의 우려와는 달리, 슬라이는 (다행스럽게도) 매너 고등학교의 입학시험을 통과했다. 이 학교에서마저 급우들에게 “고양이 실베스터!”라고 불리며 ‘왕따’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 슬라이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이름 ‘실베스터’ 대신 ‘마이클(Michael, 애칭은 마이크 Mike)’이라는 가명으로 학교에 등록하기를 원했고, 그가 그간 겪은 고충을 이해한 학교 측은 이 요구를 흔쾌히 받아주었다. 바야흐로 슬라이는 ‘마이크’로 제 2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학교의 등록금은 일반 공립 고등학교보다는 훨씬 비쌌지만, 다행히도 당시 재클린에게는 그것을 감당해낼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은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간 ‘낙오자의 길’을 걸어온 맏아들을 위해 이 정도 투자를 하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슬라이는 이 곳에서 처음으로 ‘교육다운 교육’을 받아보게 된다. 학교 측은 슬라이의 문제점을 면밀히 분석, 그에 합당한 교육 프로그램을 짜서 실행에 옮겼다. 슬라이는 정기적으로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았으며, 급우들(그리고 ‘보통 사회인들’)과 잘 융화될 수 있도록 하는 ‘특별 사교 훈련’ 받았다. 또한 그는 강도 높은 발음 교정 교육도 받았는데, 이 교육들은 시간이 갈수록 효과를 발휘했다. 슬라이는 점점 자신의 핸디캡을 잊고 감정상의 평온을 되찾게 됐으며, 급우들과의 관계도 호전돼 갔다. 무엇보다 이 학교가 그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자신감’이었다. 효과적인 집중 교육 과정 덕분에 슬라이는 많은 급우들 앞에서도 큰 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무엇보다 그는 이 곳에서 ‘만능 스포츠맨’으로 명성을 떨쳤다. 펜싱, 복싱, 풋볼 등 모든 체육 분야에서 그는 상당한 재능을 과시했으며, 후에는 풋볼 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재클린의 기대대로 슬라이는 점점 ‘정상인’이 돼 가고 있었다. 이전 고등학교에서와는 달리 학업 성적도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나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재클린은 다시 한번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슬라이는 매너 고등학교에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정신적 성장을 했지만, 그것은 ‘눈에 띄는 커리어’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의 화려한 퇴학 경력과 낮은 학업 성적은 여전히 그가 대학에 진학하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편법’을 쓰지 않는 한 슬라이가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재클린의 자식에 대한 열정은 이 순간에 다시 한번 빛났다. 슬라이가 입학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학교를 이 잡듯이 수소문한 그녀는 결국 슬라이에게 적합한 곳을 찾아내고 말았다. 바로 스위스의 레셍에 있는 아메리칸 칼리지였다. 하지만 이 곳마저 슬라이의 화려한 과거 경력을 보고는 단호하게 “No"라는 회신을 보내왔다. 재클린은 그 즉시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로 날아가 대학의 책임자와 대면했다. 재클린은 “아들의 1년 등록금을 모두 내겠다. 만약 아들이 한 학기도 마치지 못하고 낙제하게 된다면 등록금 차액은 환불하지 않아도 좋다.”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대학 측은 재클린의 단호한 태도와 자식 사랑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결국 슬라이의 입학을 허락하게 된다.


☞ 스탤론, 어머니와 함께 사진 한장!


2. No Pain, No Gain!


슬라이가 입학한 대학은 국제경영학 분야를 간판으로 내세웠던 곳으로, 약 300명 정도 되는 학부생들은 주로 부유층의 자제들이었다. ‘출신 성분’만으로 보면 슬라이는 이 학교의 학생들 중 가장 천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곳에서 - 거의 생애 최초로 - 주목받는 인물이 됐다. 매너 고등학교에서 보여주었던 체육 쪽의 재능 덕분에 그는 이 대학에서 복싱 코치를 맡게 됐는데(그와 복싱의 본격적 인연은 이 때 맺어졌다), 코치를 맡으며 그는 학교의 많은 ‘실세’들과 안면을 트게 됐다. 그 중에는 에티오피아의 왕자도 있었는데, 그는 슬라이가 교내에 패스트 푸드점을 지어 운영하도록 자금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슬라이는 보다 효과적인 돈벌이를 위해 곧 패스트 푸드점 운영을 포기하게 된다. 

 

그가 다음으로 맡은 파트 타임 잡은 바로 기숙사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 일을 맡으며 정기적인 수입 외에 짭짤한 부가 수입도 만만치 않게 챙겼다. 기숙사에 있던 여학생들은 슬라이에게 웃돈을 챙겨주며 몰래 남학생들을 들여보내 줄 것을 부탁하곤 했다. 또한 남학생들 역시 여학생들의 방을 엿보기 위해 슬라이에게 정기적인 ‘상납’을 하곤 했다. 대학 과정을 이수하면서 그는 유럽의 수준 높은 문화와 예술에 대해 이해하게 됐으며, 졸업하기 직전에는 대학 내 연극 단체에서 주관했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의 비프 역을 맡아 최초로 ‘본격적인 연기의 맛’을 보기도 했다. 발음 장애와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대인 기피증이 있었던 슬라이는 비프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면서 ‘나도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슬라이가 ‘배우’라는 직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졸업 후 슬라이는 유럽 곳곳을 배낭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게 되는데, 이 때 그는 프랑스 칸느에서 이름난 점쟁이를 만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조언을 듣기도 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슬라이도 점성술과 예언, 운명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점쟁이는 슬라이의 운명이 담긴 타로 카드를 집어 들었는데, 거기에는 ‘죽음(Death)’이 그려져 있었다. 점쟁이에 의하면 그것은 ‘슬라이의 순수(innocence)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점쟁이는 슬라이에게 ‘앞으로는 성년으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당신은 먼 훗날에 젊은 시절의 순수를 되찾게 될 것이다’라고 충고했다. 슬라이는 한참 뒤에야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됐다. (<록키>에서 <록키 발보아>에 이르기까지 슬라이의 인생을 더듬어보시길!)


☞ 마이애미 대학 재학 당시 슬라이

 

슬라이는 21세가 되던 해인 1967년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성년으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끝없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마이애미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투박한 발음(수많은 발음 교정 훈련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음은 보통 사람들의 귀에는 여전히 ‘정상적인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과 독특한 외모 때문에 슬라이는 학부생들이나 교수들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됐다. 대학의 연기 지도 교수는 슬라이의 투박한 발음을 듣고는 “배우로 성공하기는 글렀다”라고 일찌감치 결론을 내려버렸다. 절망스럽게도, 그간 유일하게 슬라이의 가치를 빛냈던 ‘체육’쪽의 재능도 이 곳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대학의 풋볼 팀이 우스꽝스러운 외모 등을 이유로 그를 ‘퇴짜’ 놓은 것이다. 하지만 슬라이는 이미 이런 종류의 괄시에는 지겹도록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는 주위의 냉대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더욱 이를 악물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었다.


슬라이의 반항기질은 이 곳에서도 여전히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교수의 지시를 묵살하고 자신만의 대사를 써서 수업 시간에 활용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 때문에 미운털이 제대로 박히게 됐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학부의 공연 작품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자, 슬라이는 자신이 직접 쓴 대본을 가지고 대학의 지하 창고에서 자신만의 1인 연극을 하며 기량을 다듬기도 했다. 물론 관객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주위의 냉대와 절망스러운 상황에 그는 서서히 지쳐갔고, 결국 졸업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대학을 그만두게 된다. 재클린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했지만, 슬라이는 더 이상 대학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에 추호의 후회도 없었다. 대학을 그만 둔 슬라이는 보다 큰 인물이 되기 위해 ‘큰 물’로 향했다. 그의 다음 목적지는 바로 뉴욕과 브로드웨이였다.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난 슬라이는 바야흐로 부모의 도움 없이 완전한 홀로서기를 해야 할 판이었다. 뉴욕으로 떠나기 전, 슬라이는 재클린을 잠시 보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들렀는데, 언제나 그랬듯 재클린은 점성술로 아들의 미래를 점쳐보고 그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점괘는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하게 나왔다: “슬라이는 향후 몇 년간 처절한 실패를 맛볼 것이며, 그 이후에나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배우가 아닌 ‘작가’로.”


슬라이는 뉴욕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가급적 이 점괘를 마음에 두지 않으려 애썼다. 어차피 뉴욕은 자신처럼 일생일대의 기회를 노리는 배우 지망생들이 넘쳐나는 곳이 아닌가? 약간의 실패를 맛보리라는 것은 점쟁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처럼 점성술을 믿는 슬라이조차 점괘대로 자신이 7년 간이나 처절한 실패를 맛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현실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냉혹했다.


☞ 스탤론, 백악관에서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슬라이의 전공은 (‘연기’가 아닌) ‘실패’와 ‘좌절’이 됐다. 슬라이에게 당시 뉴욕은 배우 자리는 고사하고, 일자리 자체를 찾기가 매우 힘든 곳이었다. 배우 자리를 얻으려면 수시로 오디션을 봐야 했는데, 이 때문에 슬라이는 (오디션 자리가 생기면 즉각 달려갈 수 있도록) 풀-타임이 아닌 파트-타임 잡을 구하여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수소문 끝에 그는 바로넷 극장(Baronet Theater)의 안내원 자리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비록 봉급은 쥐꼬리만 했지만, 슬라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 그는 ‘평생의 은인’ 중 한 명을 만나게 된다. 바로 첫 번째 아내인 사샤였다. 슬라이는 당시 매표소 직원으로 일하던 그녀를 보고는 (문자 그대로) 한 눈에 반하게 된다. 슬라이처럼 사샤 역시 배우 지망생이었으며,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호시탐탐 직업 배우가 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슬라이는 망설임 끝에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사샤에게 ‘허름한 자켓을 입은 눈이 축 쳐진 사내’가 다가와서는 어눌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나 당신 사랑하는 것 같소. (I think I love you!)" (록키가 에이드리언에게 어색하게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는 광경을 떠올리면 딱 맞다!)


☞ 스탤론의 첫 번째 아내 사샤


예상치 못했던 뚱딴지같은 상황에 사샤는 넋을 잃었고, 한 순간 이 젊은 사내가 미쳤다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그녀는 이 사내의 순박하고 꾸밈이 없는 매력에 호감을 느끼게 된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다. 이들의 타오르는 열정을 방해하는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바로 ‘가난’이었다. 1969년 당시 슬라이는 주급 38달러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서튼 호텔에 있는 허름한 방이 그의 거처였는데, 말이 호텔 방이지 이 방은 사실 한국의 낡은 고시원보다도 못한 곳이었다. 슬라이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이 방은 너무 좁아서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팔을 쭉 뻗으면 방문과 창문을 열고 닫을 수 있을 정도’였다. 목욕탕 역시 너무 좁아서, 빨래를 하고 싶으면 ‘옷을 입은 상태에서 그냥 서서 샤워를 하면 될’ 정도였다. 슬라이가 각본을 쓰고 메가폰을 잡았던 1983년 작 <스테잉 얼라이브>에 잠시 등장하는 토니 마네로(존 트라볼타 분)의 좁은 방은 바로 이 시절 슬라이가 묵었던 호텔 방을 모델로 한 것이다.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슬라이는 결코 ‘불세출의 뛰어난 각본가’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이 체험한 바를 ‘진솔하게’ 각본 속에 녹여 넣어 관객의 감성을 효과적으로 자극하는 재능은 확실히 가졌다. 배우가 아닌 ‘각본가’로서 슬라이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록키>의 에이드리언은 사샤를 모델로 한 캐릭터다.


슬라이는 ‘언젠가 배우로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1969년 당시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일단 생존하는 것’이었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하루 빨리 직업 배우가 돼야 했다. 그는 몇 푼 안 되는 주급을 쪼개어 매주 쇼 비즈니스 관련 잡지를 구입해 배우 모집 광고란을 모조리 훑어보곤 했다. 슬라이는 직업 배우 경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유니언 카드(배우 조합에 가입한 이에게 발급해주는 카드)를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슬라이가 참여할 수 있는 오디션 자리는 처음부터 제한돼 있었다. (모든 직업 배우들이 꿈꾸는 좋은 배역의 오디션 자리는 대부분 유니언 카드 소지자들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살아남아야한다’는 일념으로 자신이 참가할 수 있는 모든 오디션 자리 -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오프브로드웨이, 오프오프브로드웨이, TV 광고, 영화의 엑스트라 모집 현장까지 - 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정말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예언대로 그는 보는 오디션마다 어김없이 고배를 마셨다. 웬만한 직업 배우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하찮은 역조차 그는 맡을 수가 없었다. 슬라이는 왕년의 인기 배우 살 미네오(<이유 없는 반항>, <엑소더스>)가 주관한 자신의 뉴욕에서의 첫 번째 오디션 자리에서 당한 굴욕을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문제의 오디션은 오프브로드웨이 드라마 “Fortune and Men's Eyes"의 배우를 뽑는 자리로, 미네오 자신이 극의 감독을 맡을 예정이었다. 슬라이는 죄수 역을 지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오디션에 임했다. (우습게도 당시 그가 연기한 캐릭터의 이름은 ‘록키’였다!) 그러나 미네오는 슬라이의 리딩이 끝난 뒤, ‘죄수 역으로는 별로 위협적이지 못하다”라는 이유로 그에게 ‘퇴짜’를 놓았다. 슬라이는 이 성의 없는(?) 평가에 그만 ‘발끈’하고 말았다. 그는 마치 성난 사자처럼 씩씩거리면서 무대에서 뛰어내려와 가구며 무대 소품들을 뒤집어엎고는 미네오를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미네오의 목도리를 잡고 이렇게 외쳤다. “이제 좀 위협적인가요?!” 어안이 벙벙해진 미네오는 슬라이의 오버 액션에 ‘위협감’이 아닌 ‘살기’를 느꼈다. 미네오 뿐만 아니라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은 ‘슬라이가 미네오를 죽일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덩치로 보자면 미네오는 슬라이의 ‘한 주먹 감’도 안됐다!) 슬라이는 첫 번째 오디션에서 이렇게 요란한 쇼를 한바탕 벌인 뒤 ‘영광의 퇴짜’를 맞았다. 그리고 그는 이후로 - 자신의 약간 과장된 표현을 빌면 - 약 6~7천 번의 고배를 더 마셔야 했다.


☞ 스탤론이 주연한 액션 영화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영화 중(주로 종반부에) 주인공 캐릭터가 ‘격한 감정을 직접 표출하는 장면’이 반드시 등장한다는 것이다. ‘분노를 못 이겨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나 ‘솟구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끼는’ 모습은 어느 새 스탤론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이것은 아놀드 슈왈츠네거나 브루스 윌리스 등 8-90년대에 스탤론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다른 액션 배우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스탤론이 이렇게 ‘감정 절제를 못하는 모습’을 스크린에서 자주 보여주는 것은 그의 불행했던 과거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스탤론에게 이런 망가진(?) 연기는 일종의 ‘억눌렸던 욕망의 분출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오디션 낙방에 지칠 대로 지친 슬라이에게 유일하게 힘이 되 준 인물은 바로 사샤였다. 아무런 비전이 없어 보이는 배우 지망생이었건만, 사샤는 늘 슬라이의 곁을 지키며 그를 격려해줬다. 이 시절, 그나마 슬라이에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바로넷 극장에서의 ‘부가 수입’이 꽤 짭짤했다는 점이었다. 만일 이 ‘부가 수입’이 없었다면 슬라이는 꼼짝없이 거리로 내몰렸을지도 모른다. 바로넷 극장은 뉴욕의 1류 개봉관 중 하나로, 인기 영화가 걸렸을 때는 뱀꼬리처럼 긴 인파가 표를 사기 위해 매표소 앞에 줄을 서곤 했다. 어느 날, 슬라이는 이 붐비는 인파를 이용해 ‘뒷돈’을 챙긴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바로 줄의 뒤쪽에 서 있는 손님들에게 ‘급행료’를 받고 입장 티켓을 끊어준 뒤 신속하게 극장에 입장시키는 것이다. (미국의 극장은 한국과 같은 지정좌석제가 아니기 때문에, 먼저 입장하는 사람이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이것은 뉴욕의 영화광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슬라이는 이 방법을 통해 1주일에 300~600달러에 이르는 부가수입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로버트 알트만의 대형 히트작 <매쉬>(1970)가 절찬리에 상영하고 있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뒤쪽 줄에서 적당한 ‘타킷’을 찾던 슬라이는 고급 정장을 입은 한 노신사를 발견하고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에게 다가가 ‘뒷거래’를 제안했다. 헌데, 재수 없게도 이 노신사는 바로 슬라이가 일하는 극장의 소유주인 월터 리드였다. (월터 리드는 당시 바로넷 극장을 비롯한 미국의 큰 극장을 다수 소유하고 있던 거물급 인사였다.) 리드는 곧장 ‘노발대발’ 모드로 돌입, 눈이 처진 불쌍한 사내를 그 자리에서 해고해버리고 말았다!


☞ “슬라이의 법칙” - 제길, 뭐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네!


졸지에 실직자가 된 슬라이는 ‘일단 굶어죽지 않기’ 위해 갖은 잡일- 피자 배달부, 식당 종업원, 동물원 잡역부 등 - 을 전전하며 푼돈을 모았다. 게 중에는 동물원 일의 수입이 그나마 (금액은 적지만) 안정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슬라이는 품위 따위는 완전히 시궁창에 집어던져야 했다. 그가 맡은 일 중 가장 골치 아픈 것은 바로 동물 우리 안을 청소하는 일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 안의 사자들은 슬라이만 보면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그를 향해 ‘실례’를 하는 못된 습관이 있었다. 슬라이는 옷에 묻은 사자들의 오줌 냄새가 아무리 세탁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대략 난감’ 모드에 빠졌다. 우습게도, 이 오줌 냄새 덕분에 슬라이는 지하철을 탈 때 늘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그의 옷에서 풍기는 악취가 워낙 지독해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고 열차의 다음 칸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잡일들은 어차피 슬라이에게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안정된’ 배우 자리를 찾아야 했다. 끝없는 ‘실패’ 끝에 그는 가까스로 ‘익스텐션’이라 불리는 오프오프브로드웨이 연극 그룹의 일원이 됐다. 이 그룹이 하는 실험극 공연에는 숨은 인재를 발굴하려는 에이전트나 제작자들이 자주 관객으로 참여했는데, 슬라이에게 이는 하늘이 내려 준 기회로 보였다. 그러나 이 그룹의 공연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돈을 받지 않고 하는 공연’이라는 것. 잠시 동안 이 그룹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슬라이는 얼마 후 밀린 방세도 낼 수 없는 알거지 신세가 됐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슬라이는 ‘일단 살고 보자’라는 일념으로 직업 배우를 꿈꾸는 이가 할 수 있는(또는 ‘해서는 안 되는’) ‘최악의 선택’까지 해야 했다. 어느 날, 슬라이의 건장한 몸에 눈독을 들인 한 영화 제작자가 그에게 캐스팅을 제안해왔는데, 영화의 제목은 <파티 앳 키티 앤 스터드 Party at Kitty and Studs>였다. 하지만 슬라이는 ‘그토록 꿈꾸던 배우가 됐다’고 기뻐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 작품은 ‘건장한 육체를 이용해 하루나 이틀 만에 찍을 수 있는, 배우로써의 연기력은 전혀 요구되지 않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유치찬란한 제목에서 대략 짐작할 수 있듯, 이것은 ‘포르노 영화’였다. 하지만 당시 슬라이에게는 앞뒤 재고 이것저것 계산을 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에게 제시된 출연료는 200달러였는데, 이것은 슬라이가 갖은 잡역으로 한 달 동안 일해야지만 가까스로 벌 수 있는 큰(?) 금액이었다.


슬라이는 ‘어차피 나는 매일 밤 자기 전에 옷을 벗곤 하지 않았나? 옷만 벗으면 돈을 준다는데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라고 굳게 마음을 먹고 카메라 앞에서 과감히 옷을 벗었다. 영화는 단 며칠 만에 - 슬라이는 고작 이틀 동안 옷을 벗고 200달러를 챙겼다 - 속성으로 완성됐는데, 참으로 우스운 것은 이 작품은 ‘포르노 영화의 기준’으로 평가해도 너무 못 만든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슬라이가 <록키>로 수퍼스타가 된 직후에 <이탈리안 종마 The Italian Stallion>이라는 ‘얍삽한’ 제목으로 재공개됐는데, 이 버전은 하드코어 신들이 잘려나간 재편집 버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편집 상태가 지저분했던 영화는 재편집의 결과 완전히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 스탤론이 출연한 포르노 영화 <이탈리안 종마>. 참고로 위 사진의 DVD는 하드코어 신들이 잘려나간 재편집본이다. 글쓴이는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이 작품을 감상했는데, 끝까지 보기가 정말로 쉽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제길, 눈 버렸네!” 특히 그 멍청한 누드 댄스 장면에서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스탤론을 정말로 아끼는 팬이라면 이 영화만큼은 절대 구해 보지 마시길.


슬라이는 같은 해에 또 한 차례 ‘돈을 위해’ 옷을 벗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카메라 앞이 아닌 ‘무대에’서였다. 슬라이는 오프브로드웨이 극 <스코어 Score>에 캐스팅됐는데, 제리 더글라스가 극본과 감독을 맡은 이 작품의 소재는 ‘부부 스와핑’이었다. 극은 스와핑을 즐기는 두 부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중간에 전화 수리공이 갑자기 등장해 두 부부의 난교에 끼어들게 되는데 슬라이는 바로 이 전화 수리공 역을 맡았다. 더글라스가 슬라이에게 이 역을 맡긴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몸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포르노 영화까지 찍어본 슬라이에게 몇 안 되는 관객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전혀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예상치 못했던 것이 있다면, 평론가들의 반응이었다. 더글라스의 ‘예술적 욕심(?)’과는 관계없이, 이 연극의 홍보는 ‘여배우의 나신을 훔쳐보려는’ 음탕한 성인 남성 관객들을 타깃으로 하여 진행됐는데, 이 때문에 연극은 본격적인 상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평론가들의 미움을 제대로 사게 됐다.


1970년 10월에 상연이 시작된 직후, 언론매체에서 연극에 대한 살인적인 혹평이 쏟아진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헌데, 놀랍게도 게 중에는 연극에 대해 - 특히 배우들의 연기력에 대해 - 호의적인 평을 내린 매체도 (극소수지만) 있었다. 특히 유명 연예잡지 버라이어티 지는 “배우들 중 가장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 이는 바로 전화 수리공 역을 맡은 실베스터 스탤론이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슬라이에게 이것은 실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최초로 영향력 있는 대중 언론지에서 ‘제대로 된 배우로’ 인정을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연극 <스코어>가 (언론의 대대적인 혹평 공세 등으로 인해) 고작 23회의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슬라이는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됐다.


☞ 스탤론이 ‘정열의 누드 연기’를 펼친 연극 <스코어>. 우습게도 이 연극에서 스탤론이 맡았던 캐릭터의 극중 이름은 ‘마이크’(스탤론 자신의 별칭 중 하나)였다. 종연 당시 이 연극이 곧 영화로 제작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아 스탤론을 기대에 부풀게 했는데, 결국 그에게 캐스팅 제안은 오지 않았다. <스코어>의 영화 버전은 1973년에 소프트 코어물의 거장 래들리 메츠거가 제작했는데, 여기서 마이크 역은 배우보다는 담배 광고 모델로 더 잘 알려졌던 칼 파커가 맡았다.


☞ 래들리 메츠거 감독의 영화판 <스코어> DVD


물론 이 ‘절망의 시기’에 슬라이가 영화에 전혀 출현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영화 마니아들이라면 그가 우디 알랜의 <바나나 공화국 Bananas>이나 알란 J. 파큘라의 <클루트>에서 엑스트라로 잠깐 등장했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들 속에 비친 모습에서 엿볼 수 있듯, 당시 영화 캐스팅 담당자들 중 슬라이를 ‘정상적인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을 배우로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봐도 슬라이의 외모는 건달이나 부랑자, 강도, 비행 청소년 - 그것도 ‘주인공’급이 아닌 ‘엑스트라급’의 - 과 같은 지저분한 역에나 어울릴 것으로 보였다. 또한, 캐스팅 담당자가 그의 투박한 발음을 들은 후에는 (그렇지 않아도 낮았던) 그의 캐스팅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지곤 했다. 

 

슬라이의 열혈 팬들에게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슬라이는 기실 이 시기에 <노 플레이스 투 하이드 No Place to Hide>라는 초저예산 독립 영화에서는 이례적으로 ‘주연’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비평적으로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데다가 사소한 내부 문제까지 겹쳐 잠시 극장에 걸렸다가 곧장 ‘창고 행’이 됐다. 이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1975년에 재개봉했는데, 영화 자체가 1960년대 말의 시대적 정서를 반영한 작품이어서 대중들의 흥미를 끄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물론 이 사건은 당시 슬라이가 겪었던 무수히 많은 시련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 시기,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슬라이의 손을 잡아주었던 이는 바로 연인 사샤였다. (만일 그녀가 이 때 슬라이를 ‘구원해주지’ 않았다면 <록키>의 신화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1971년부터 그녀는 슬라이와의 동거 생활에 돌입했다. 이 때부터 그녀는 유명한 여배우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까지도 포기한 채, 본격적으로 슬라이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로넷 극장 일을 그만 두고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사실상) 두 사람의 생계를 책임졌다. 하지만 사샤의 헌신적 노력과 슬라이의 필사적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가난뱅이 커플’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그러던 중, ‘불운아’ 슬라이에게도 마침내 기회가 왔다.


☞ 스탤론에게 참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겨주었던 영화 중 한 편인 <스테이 헝그리 Stay Hungry>(1976, 밥 라펠슨 감독). 가난뱅이 시절, 스탤론은 이 영화에 나오는 보디빌더 조 산토 역을 따내기 위해 오디션에 참가했다. ‘몸매’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던 스탤론은 자신이 산토 역을 따낼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만(사실 이것은 큰 착각이었다. 당시만 해도 스탤론의 몸은 ‘일반인’의 기준으로 봤을 때 좋았을 뿐이지 보디빌더 역을 단숨에 따낼 정도로 탄탄하지는 않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강력한 적수에게 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 ‘괴물 같은’ 경쟁자의 몸매를 본 순간,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스탤론은 취미로 몸매를 가꾸었던 ‘순수 아마추어’ 보디빌더였지만, 그의 경쟁자는 미스터 올림피아 대회에서 수차례나 우승을 한 프로페셔널 보디빌더였다. 슬라이에게 굴욕을 안겨준 문제의 인물은 바로 ‘살아있는 보디빌딩계의 전설’ 아놀드 슈왈츠네거였다. 1980년대를 대표하던 두 거물급 액션 배우의 경쟁은 사실상 이 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3. Underground Contender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슬라이의 법칙’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슬라이는 우연히 친구의 부탁으로 한 저예산 독립 영화의 오디션 현장을 방문했다. 그는 이 곳에서 오디션을 보는 친구의 상대역을 맡아주었다. 헌데, 리딩이 끝난 후 슬라이도 깜짝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다. 정작 오디션을 본 친구는 탈락하고 슬라이가 배역을 맡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슬라이가 따낸 역은 그때까지 자신이 맡아온 지저분한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비중 있는 역이었다. 문제의 영화는 바로 컬트 청춘영화인 <브룩클린의 아이들 The Lords of Flatbush>이었다. 

 

이 영화는 젊은 극작가 콤비인 스티븐 베로나와 마틴 데이비슨이 각본을 쓴 작품(베로나-데이비슨 콤비는 이 영화의 감독도 맡았다)으로, 슬라이는 영화에 등장하는 네 명의 비행 청소년 중 가장 몸이 좋은(그러나 상대적으로 약간 덜 떨어진!) 캐릭터인 ‘스탠리’ 역을 맡았다. (이것은 당시 슬라이의 치명적인 핸디캡 - 외모와 발음 장애 - 을 고려한다면, 그가 맡을 수 있는 ‘최상의 배역’으로 여겨졌다) 슬라이는 베로나-데이비슨 콤비가 쓴 각본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으며 영화에 대한 기대도 상당히 컸다. 슬라이가 이 영화에 큰 기대를 건 이유는 단지 각본 내용이 신선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연기를 한 배우들이 모두 재능 있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영화에서 슬라이와 공연한 배우들 - 페리 킹, 헨리 윙클러, 수잔 블레이클리 - 은 1970년대 후반에 TV 극 등을 통해 대부분 스타배우로 성장했다.)

 

☞ 스탤론이 출연한 영화 <브룩클린의 아이들>


이 영화는 (초저예산 영화답지 않게) 촬영에서 개봉까지 무려 2년이 넘는 기간이 소요됐는데, 그 이유는 자금난 때문에 영화의 제작이 두 차례나 중지됐기 때문이다. 베로나-데이비슨 콤비를 비롯한 스텝들은 영화의 제작이 중지되자 지인과 연줄을 총동원하여 푼돈을 긁어모았다. 결국 주위 사람들의 헌신적인 도움에 힘입어 영화는 1974년에야 가까스로 완성됐다. 하지만 2년에 걸친 그들의 노력은 다행히도 값진 결실로 이어졌다. 이 영화는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흥행수입을 올리며 배급을 맡은 콜럼비아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슬라이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제이 콕스(당시 타임 지의 평론가로 활동함)와 같은 유명 평론가들이 그의 연기에 대해 호평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제이 콕스는 ‘Truly exceptional'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슬라이의 연기를 높게 평가했다.) 슬라이의 필모에서 이 영화가 매우 의미심장한 이유는 이 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슬라이가 최초로 크레딧 상 ‘각본가’(비록 정식 각본가가 아닌 ‘additional dialogue'를 제공한 이로 기록되긴 했지만)로 이름을 올린 작품이다. 슬라이는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 ‘스탠리’의 대사의 상당부분을 직접 썼는데, 베로나-데이비슨 콤비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크레딧 상 그가 ‘additional dialogue' 제공자로 기록되도록 배려했다. 기실, 슬라이에게 이것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것 이상으로 뜻 깊은 일이었다. 늘 ’물음표‘를 달고 있던 각본가로서의 자신의 자질을 제 3자가 확인해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 <브룩클린의 아이들>에 출연한 스탤론의 모습.


☞ <브룩클린의 아이들> 이후 스탤론은 <데스 레이스 2000>, <카포네>(두 편 모두 B급 영화의 대부 로저 코만이 제작) 등에 출연했다. 비록 영화 자체는 별 인기를 끌지 못했고 출연료도 쥐꼬리 같았지만, 이 작품들에서 스탤론의 연기만큼은 여러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알 카포네를 소재로 한 <카포네>에서의 프랭크 니티 역의 연기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몇몇 평론가들의 호평에도 불구, 스탤론은 여전히 영화계에서는 ‘별 볼일 없는 무명 배우’로 남아있었다. 여기에는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의 정형성(대부분 건달, 강도, 폭력배, 비행 청소년)도 크게 작용했다. <록키> 이전까지 스탤론에게 ‘정상적인 주인공’ 역을 맡길 정신 나간(?) 캐스팅 담당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슬라이가 배우가 아닌 각본가로서의 커리어에 관심을 가진 것은 <브룩클린의 아이들> 때가 처음은 아니다. 오디션에서 물을 먹는 일이 ‘일상생활’이 되자, 슬라이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예언을 떠올리게 된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슬라이에게 이 예언은 ‘어이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어린 시절, 슬라이는 ‘문학소년’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문학 과목에서 밥 먹듯이 낙제를 했으며, 비록 ‘철이 든’ 후에는 독서에 제법 맛을 들이긴 했지만 그것은 ‘작가로서 성공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그러나 끊임없는 좌절의 시기였던 70년대 초, 배우로서 자신이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한 슬라이는 결국 다른 삶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 펜을 들기로 결심했다.


각본가에의 도전은 슬라이가 생존을 위해 꺼내들 수 있는 마지막 카드로 여겨졌다. 만약 이 마저도 실패로 돌아간다면 슬라이의 인생에서 ‘미래’라는 단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에는 정말 끝을 보자’라는 비장한 각오로 검은 색 스프레이를 사와서 창문을 모두 칠했으며, 전화 코드도 뽑아버렸다. 적어도 글을 쓰는 동안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기를 원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골방에 가둬놓은 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글을 써내려갔다. 한 번 점화된 그의 ‘집필 에너지’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이후 슬라이는 오디션이 없을 때는 무조건 골방으로 달려가 글을 쓰곤 했다. 그가 처음 쓴 각본 몇 편은 스스로 읽어보아도 ‘끔찍하게 못 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단계에서는 자신이 ‘그 (형편없는) 각본을 끝까지 썼다’는 사실 자체에 뿌듯함을 느꼈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글 솜씨는 늘어갔다. 무엇보다 경이적인 것은 그의 글 쓰는 속도였다. 그는 단 며칠 만에 두터운 분량의 각본을 완성시키곤 했는데, 에너지가 충만한 날에는 여섯 시간짜리 TV극 각본을 단 하루 만에 쓰기도 했다. 헌데, 문제는 그의 각본에 관심을 가지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 무명시절, 스탤론이 오디션을 본 영화 중에는 <뜨거운 오후 Dog Day Afternoon>, <롤러볼 Rollerball>, <형사 서피코 Serpico>, <대부 2>도 포함돼 있다. 물론 스탤론은 이 중 단 한 작품에도 출연하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들 중 세 편은 ‘젊은 시절의 외모가 스탤론과 유사했던’ 연기파 명배우 알 파치노가 주연을 맡은 작품들이었다. 실제로 스탤론은 과거에 ‘외모의 유사성’ 때문에 종종 언론에서 알 파치노와 비교되곤 했다. 비록 커리어 상 두 사람의 유사점은 거의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74년, 슬라이는 <브룩클린의 아이들>의 출연료를 털어서 중고차를 하나 구입했다. ‘보다 많은 기회를 보장해주는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 위해서였다. 그의 목적지는 바로 ‘할리우드’였다. 중고차에는 연인 사샤와 슬라이가 애지중지하던 커다란 개 벗커스(<록키>에 출연한 바로 그 개), 그리고 슬라이 자신 등 세 사람이 탔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후 그들은 작고 허름한 아파트를 구해 제 2의 ‘가난뱅이 삶’을 시작했다.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는 유명한 맨스 차이니스 극장 - 이 극장 앞에는 200여명의 영화계 명사들의 손과 발자국 도장이 새겨져 있다 - 이 있었는데, 무명배우였던 슬라이에게 그 곳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꿈의 전당’으로 여겨졌다. (물론 슬라이는 당시만 해도 10여년 뒤 그 곳에 자신의 손, 발도장이 새겨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곳에서도 슬라이는 오디션이 없는 날에는 쉬지 않고 각본을 써내려갔다. 그는 수 십 편에 달하는 TV극 및 영화의 각본을 썼는데, 그 중에는 <헬스 키친 Hell's Kitchen>과 같이 운 좋게 팔려나간 것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작품은 제작자들의 주목을 전혀 끌지 못했다. (오랫동안 허공을 떠돌던 <헬스 키친>은 1978년에야 - 슬라이 자신에 의해 - 비로소 영화화됐다. 슬라이는 자신의 감독 데뷔작이었던 이 작품의 제목을 <파라다이스 앨리 Paradise Alley>로 바꿔서 공개했다.) 1974년 12월 28일, 슬라이와 사샤는 ‘눈물의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당일에 사샤는 직접 손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었으며, 슬라이는 <카포네> 촬영용으로 대여했던 정장을 입었다. 비록 가진 것은 쥐뿔도 없었지만, ‘젊고 에너제틱한’ 커플이었던 두 사람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은 현실의 냉혹함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두 사람의 필사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재정 상태는 갈수록 나빠졌고, 급기야 그들은 집세도 내기 어려운 지경에 몰렸다. 슬라이가 쓴 각본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가 배우로 대성할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해보였다.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의 통장 잔고는 거의 바닥이 났고, 슬라이의 개 벗커스는 (슬라이 자신의 표현을 빌면)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벼룩을 잡아먹고 있었다. (슬라이는 자신의 29번째 생일에 있었던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슬라이의 29번째 생일을 맞아 사샤는 1.15 달러를 주고 작은 케이크를 사 왔다. 생일 축가를 부른 뒤, 사샤는 슬라이에게 “소원을 말하세요!”라고 말했다. 슬라이는 이렇게 빌었다. “제발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게 해주세요!”) 한 순간, 슬라이는 ‘이대로는 안 된다.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바로 이 순간이 바로 그의 삶에 있어서의 전환점이었다.


☞ 스탤론의 감독 데뷔작인 <파라다이스 앨리>(1978). 스탤론은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고 어찌나 긴장했는지, “액션!”을 외치는 것을 잊어서 본의 아니게 촬영을 몇 차례나 지연시키곤 했다.


슬라이는 지금껏 자신이 썼던 각본에 중대한 문제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쓴 모든 각본에는 염세주의와 허무주의가 넘쳐났는데, 이것은 절반 정도는 슬라이 자신의 비참한 삶이 반영된 결과였고, 절반 정도는 당시 미국 영화의 경향을 맹목적으로 좆은 결과였다.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을 거치면서 미국에는 비관주의가 팽배해있었다. 1970년대에 인기를 끈 영화들 중 상당수는 이런 시대의 조류를 좆아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뤘다.) 슬라이는 이제 과감하게 주제를 바꿔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모범답안은 물론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는 ‘과연 내가 정말로 보고 싶은 영화는 어떤 내용일까’라고 생각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런 소재들이 펼쳐졌다: “영웅주의, 낙관주의, 용기와 사랑,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 생각해보면, 이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과거 슬라이가 좋아했던 만화나 영화 - <수퍼보이>, <헤라클레스> 등 - 은 모조리 이런 주제를 다룬 것들이 아닌가?! 하지만 더 웃긴 것은 당시 할리우드는 이런 내용의 영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덜 돼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스타워즈>가 개봉하기 전임을 상기하시라.)


‘사실주의’, 그리고 ‘어른스러운 영화’를 신봉하던 당시 영화계(그리고 비평계)는 이런 낙관주의나 영웅주의가 1930~40년대 영화에나 어울리는 소재로 여겼다. 말하자면 슬라이나 조지 루카스는 이런 할리우드의 경향에 반기를 든 최초의 인물들이었던 셈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슬라이는 자신이 새로 쓸 각본의 ‘윤곽’을 비로소 잡을 수 있었다. 이제 다음 단계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1975년 3월 24일,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슬라이는 새 각본의 소재를 찾아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복싱 팬이었던 슬라이는 우연히 그 날 '말 많은 경기‘의 중계를 보기 위해 윌턴 시어터를 찾았다. 그 곳에서 그가 본 ‘운명의 게임’은 바로 무하마드 알리와 척 웨프너의 경기였다.


☞ 1975년 3월 24일, 클리블랜드에서 펼쳐진 무하마드 알리 vs. 척 웨프너의 경기


☞ 1975년 3월 24일의 히어로 척 웨프너


무하마드 알리는 설명이 전혀 필요 없는 복싱계의 영웅이며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물론 슬라이 역시 알리의 팬이었다.) 그런 그에게 도전장을 내민 복서 척 웨프너는 알리에 비하면 거의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관중과 도박사들에게 이 경기는 거의 ‘실없는 조크’로 여겨졌다. 많은 도박사들은 알리가 3라운드 이내에 웨프너를 KO시킬 것이라고 내다봤고, 그 중 상당수는 승부가 1라운드에 갈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알리의 승리를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며, 남은 문제는 ‘과연 몇 회에 웨프너가 쓰러질 것인가’였다. 헌데 이 날, 클리블랜드의 스타디움에 운집한 1만 5천 명의 관객과 중계방송으로 경기를 지켜본 수많은 시청자들은 평생 잊지 못할 ‘기적’을 목격했다. 많은 도박사들이 예언한 ‘1라운드’에 웨프너는 쓰러지지 않았으며, ‘3라운드’에도 웨프너는 건재했다. ‘아무런 일 없는’ 라운드가 거듭되자 관중석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9라운드가 되자, 도저히 믿기 힘든 사건이 발생했다. 웨프너의 라이트 훅에 알리가 쓰러진 것이다. (경기 직후, 알리의 다운을 놓고 스포츠 전문가와 팬들 사이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몇몇 이들은 실제로 웨프너가 펀치로 알리를 다운시켰다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웨프너가 알리의 발을 밟고는 그를 ‘밀었다’고 주장했다. 어찌됐건, 경기의 주심은 알리의 다운을 인정했다.) ‘천하의’ 알리가 다운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도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그를 쓰러뜨린 이가 이름도 생소한 복서였다는 것은 더욱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알리는 곧 일어났고, 이후 웨프너를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웨프너의 두 눈은 상처로 퉁퉁 부르텄고, 피가 흘러서 앞도 보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버티고 또 버텼다. 운명의 15라운드. 웨프너는 결국 쓰러졌으나, 끝까지 로프를 붙잡고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주심은 이 때서야 알리에게 TKO 승을 선언했다. 경기를 지켜본 모든 이들은 웨프너의 눈물겨운 파이팅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완벽한 복서 알리를 맞아 ‘무려’ 15회까지 버텼다는 것은 무명의 복서에게는 사실상 승리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 “알리가 쓰러졌다!”


슬라이가 본 것은 ‘아메리칸 드림’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슬라이는 상처투성이가 된 척 웨프너의 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 날, 그는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의 쾌감을 온 몸으로 느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얼마 후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이 시합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하여 ‘무명 복서’의 이야기를 3일 동안 미친 듯 써내려갔다. 언제나 그랬듯, 사샤는 옆에서 그를 돕고 있었다. (슬라이가 스토리를 쓰면 사샤는 그것을 타이핑해주곤 했다.) <록키>의 첫 번째 드래프트는 이렇게 해서 완성됐다. 슬라이는 “<록키>는 나의 이야기다”라고 단언했다. 그가 ‘무명 복서의 삶’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지독하게 인기 없는 배우/작가의 이야기에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록키는 - 척 웨프너가 그랬듯 - 최강의 세계 챔피언과 15회까지 당당히 겨루고, 결국 패배한다. 하지만 그 결과 그는 (정작 시합에서 이긴 챔피언은 잃어버린) ‘자존심’이라는 최대의 가치를 획득한다. 결국 시합의 진정한 승자는 록키인 것이다.


훗날 슬라이는 <록키>의 첫 번째 드래프트의 내용이 너무나 자전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극의 주인공이 갖추어야 할 ‘영웅성’은 이 드래프트에서는 별로 부각되지도 않았으며, 플롯의 분위기 자체가 (결말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어두웠던 것이다. 하지만 슬라이가 의도한 ‘아메리칸 드림’ 이야기의 골자는 이미 이 드래프트에서도 선명하게 부각됐다. 슬라이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3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이야기를 쓰는 데 몰입했는지에 알지 못했다. 누구도 그의 각본을 원하지 않았고, 어떤 제작자도 그에게 ‘3일 내에 각본을 완성하라’는 데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그의 무의식 속에는 ‘지금이 아니면 이 이야기를 써서 팔 수 없다’라는 경각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직감대로, <록키>는 당시 미국의 대중들이 간절히 원하던 그런 종류의 ‘영웅 이야기’인 동시에 ‘희망의 메시지’였다.


☞ 스탤론이 쓴 <록키>의 각본


슬라이의 에이전트는 드래프트의 내용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곧 그것을 어윈 윙클러와 로버트 차토프에게 막 고용된 신예 제작자 진 커크우드에게 보여줬다. 커크우드 역시 슬라이의 드래프트에서 가능성을 엿봤고, 곧 드래프트는 윙클러-차토프 콤비에게 넘어갔다. 윙클러와 차토프는 비평적 갈채를 받은 <그들은 말을 쏘았다 They Shoot Horses, Don't they?>(1969)등 제법 많은 아트하우스 수작영화를 만든 제작자 콤비인데, 당시 그들은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슬라이가 쓴 드래프트를 본 순간, 그들은 애타게 찾던 ‘보물’을 드디어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드래프트에는 다듬어야 할 부분이 적지 않았다. 우선 플롯 전개 자체가 투박하고 거칠었으며 내용도 너무 어두웠다. 제작자들은 ‘역경을 딛고 인생의 승리자가 되는 평범한 영웅’ 이야기에 걸맞도록 내용을 대폭 수정할 것을 슬라이에게 요구했고, 슬라이는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슬라이는 제작자들과 계속 의견 교환을 하며 드래프트를 손질했으며, 마침내 (우리가 본) 영화의 내용에 가까운 각본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각본에 대한 제작자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좋았어! 우린 이 각본을 원하네!”


☞ 스탤론의 ‘은인’ 중 한 명인 제작자 어윈 윙클러. 그는 훗날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비공개 Guilty By Suspicion>(1991)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윙클러와 차토프는 각본을 들고 곧장 다음 단계로 돌입했다. 바로 ‘물주’인 UA(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구슬려 제작비를 지원받는 일이었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록키>는 ‘참신한 저예산 영화’로만 여겨졌다. 슬라이의 각본을 본 사람들 중 이 작품이 박스오피스를 ‘평정’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록키>에는 (당시 흥행의 필수요건이라고 여겨지던) 섹스 신이나 폭력 신(복싱 시합 장면이 아닌 ‘물리적 폭력 신’을 말한다)이 사실상 전무했으며, 주인공도 전통적인 영웅상과는 동떨어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지배하고 있던 상업논리는 바로 ‘평균의 법칙’이었다. 즉, 스튜디오가 최대한 많은 작품을 배급할수록 ‘빅 히트작’이 나올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물론 스튜디오가 1년에 배급하는 영화들 중 빅 히트작이 되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애당초 ‘빅 히트작’으로 점쳐지지 않는 작품의 경우, 스튜디오는 ‘제작비보다 약간 높은 수입’, 최악의 경우 ‘본전치기’만 해도 성공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스튜디오의 제작 및 배급 전략은 ‘흥행 실패작의 양산을 최소화하면서 평균, 혹은 평균 이상의 흥행 수입을 올리는 작품의 양산을 최대화하는’ 쪽으로 포커스가 고정돼 있었다. 여기서 정말 골치 아픈 문제는, 스튜디오가 배급하는 작품들 중 어느 것이 빅 히트작이 될지는 ‘며느리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스튜디오가 간판 프로젝트로 내세운 영화들이 박스오피스에서 맥을 못 추고 사라지는 일이 빈번한 반면, <매쉬>(1970)의 경우처럼 생각지도 않았던 작품이 크게 히트하는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록키>는 UA의 입장에서는 ‘제작비보다 약간 높은 수입만 벌어들여도 대성공’인 싸구려 작품이었다.


당연하게도, UA는 최소한의 흥행수익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려 했다. 스튜디오의 전통적인 ‘안전장치’는 바로 ‘스타의 캐스팅’이었다. 즉,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배우를 한 두 명 정도만 캐스팅한다면 영화의 완성도가 아무리 형편없다고 해도 (흥행에 있어서의) 최악의 상황은 모면할 수 있다는 것이 스튜디오의 계산이었다. 이 논리에 따라, UA는 버트 레이놀즈나 폴 뉴만, 로버트 레드포드 등의 스타 배우들에게 <록키>의 주연 배우를 맡기려 했다. 스튜디오는 한 때, 영화의 주인공에 어울리는 체격 조건을 갖춘 제임스 칸과 라이언 오닐을 <록키>의 후보로 강력히 지목했다. 윙클러-차토프 콤비 역시 UA의 이 제안에는 별 이의가 없었다. 그리고 (캐스팅에 대한 조건을 전제로) 슬라이에게는 각본료로 7만 5천 달러가 제시됐다. 이것은 당시 슬라이에게는 ‘잭팟’이나 다름없는 큰 금액이었다. 슬라이와 사샤가 그 때 알거지가 되기 일보직전이었다는 것은 제작자들도 소문을 통해 알고 있는 바였다. (각본료 제안이 들어왔을 때, 그들의 통장 잔고는 106달러에 불과했다.) 슬라이는 이 제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No!"



제작자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그들은 슬라이가 ‘각본료를 올리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작자들은 각본에서 이미 충분한 가능성을 엿봤고, UA역시 슬라이의 각본을 원했기 때문에 각본료는 자연스럽게 10만 달러, 그리고 12만 5천 달러로 올라갔다. 하지만 슬라이의 대답은 여전히 "No"였다. 제작자들은 “도대체 뭐가 불만인가?”라고 물었다. 슬라이는 이렇게 간단히 대답했다. “이 각본은 저를 위해 쓴 것입니다!” 사실 윙클러-차토프 콤비 역시 슬라이의 요구대로 그에게 록키 역을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들의 ‘물주’인 UA가 슬라이의 ‘상품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 걸림돌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UA의 간부들은 슬라이가 어떻게 생긴 배우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각본료는 20만 달러, 23만 5천 달러, 급기야는 25만 5천 달러까지 올라갔지만 슬라이의 대답은 한결같이 “No"였다. “자네 미쳤구먼!” “압니다! 하지만 주인공 역은 꼭 제가 맡아야 합니다!” 각본료가 계속 올라가자 슬라이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가 아니면 배우로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기회를 영원히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는 마음을 더욱 독하게 먹었다. 비록 궁핍한 삶에 찌들어 있었지만, 사샤 역시 슬라이의 뜻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그에게 힘이 되어줬다. (글쓴이 주: 당시 UA의 홍보 담당자였던 게이브 섬너는 훗날 ‘슬라이가 자신을 주연 배우로 고용하지 않으면 각본을 팔지 않겠다고 완강히 저항했다’는 이 유명한 일화는 영화의 홍보를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 UA 자체의 홍보용 자료 외에도 - 이 이야기를 입증하는 보도 자료는 상당히 많으며, 슬라이 자신도 "The Official Rocky Scrapbook"등의 출판물과 여러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이 이야기의 진위성을 주장한 바 있다.)


물론 슬라이도 어느 순간 UA가 각본을 사는 것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문자 그대로 'Nothing to Lose'였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튜디오가 도저히 협상을 하기 힘든 ‘말이 안 통하는’ 인물이 돼버린 셈이다. 결국 그는 스튜디오의 항복을 받아냈다. 슬라이는 <록키>의 주인공 역으로 낙점됐으며, 영화의 예산은 1백만 달러로 책정됐다. 영화의 주연을 허락해준 데 대한 대가로 슬라이의 각본료는 약 2만 달러로 ‘폭삭’ 낮아졌으며, 대신 그는 영화 흥행 수입의 10%를 받기로 했다. 슬라이에게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슬라이의 말을 빌면) 당시 그는 ‘공짜로라도’ 영화의 주연을 맡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UA에게도 이 계약 내용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록키>가 대박 흥행을 기록할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곤혹을 치렀던 이들은 바로 윙클러-차토프 콤비였다. 계약 내용에 의하면, UA는 딱 1백만 달러만을 제작비로 부담하며, 만일 제작비가 그 금액을 초과할 경우는 초과 금액 전액을 윙클러-차토프가 지불해야 했다. 결국 그들은 영화의 완성에 대한 보험으로 자신들의 집을 저당 잡혀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들은 앞으로 일어날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예언하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2007. 3. 14 | 김정대(antoine@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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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Updated at 2019-03-20 02:37:10

불타는 록키의 연대기도 부활했군요. <크리드>로 대물림까지 성공한 무렵이라

시의적절하고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03-20 07:27:26

록키의 탄생비화군요. 글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2019-03-20 08:49:10

글 다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03-20 09:09:44

좋아하던 배우에대하여 새롭게 알게됬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03-20 10:02:16

참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

2019-03-20 11:20:18

역시 몰입감..최고입니다

2019-03-20 11:24:00

최근에 록키부터 록키 발보아까지 다 정주행 천천히 했는데

참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스텔론의 피와 땀이 어린 영화 록키였네요.

아마 죽을때까지 에이드리안~하고 피투성이가 되서 링에서 외치던 모습과

gonna fly me(?) 주제가는 잊지 못할 것 같네요.

2019-03-20 16:48:41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03-20 17:05:15

지금까지 봤던 영화칼럼중에 제일 예술이네요

Updated at 2019-03-20 20:52:26

김정대님! 책내주시면 안될까요??
두권살게요! 아니 열권살게요!!

2019-03-20 22:30:45

블레이드러너 2부도 올려주셨으면...

2019-03-21 16:47:12

이래서 디피를 좋아하지만...

정말 좋은글 감사합니다.

2019-03-21 23:58:48

정대님, 디피에 영화 칼럼 다시 올리실 때가 되지 않았나요? 제발요

2019-03-25 12:22:13

슬라이의 인생 자체가 또 하나의 영화군요.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2022-07-19 18:21:49

격한 감동이 몰려옵니다. 에이드리아안~~~ 에이드리이아아안~~~~!!!!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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