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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쓰지 못하리라 확신할 때 쓰기 시작합니다, 이탈로 칼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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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10-31 14:18:26

The Written World and the Unwritten world라는 제목으로 이탈로 칼비노의 에세이집이 나왔습니다. 한글제목으로 번역해보자니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그 만큼 제목이 오묘합니다.

 

The Written World And The Unwritten World: Essays - Italo Calvino

https://www.goodreads.com/book/show/22749722-the-written-world-and-the-unwritten-world?from_search=true&from_srp=true&qid=Dzha90Laep&rank=1

 

구글북 샘플(30페이지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play.google.com/books/reader?id=jIidBAAAQBAJ&pg=GBS.PT5&hl=en

 

이탈로 칼비노 

https://namu.wiki/w/%EC%9D%B4%ED%83%88%EB%A1%9C%20%EC%B9%BC%EB%B9%84%EB%85%B8 

 

'성문계와 불문계' 

이탈로 칼비노의 에세이 모음집 신간인데 제가 멋대로 한자번역해보니 이렇게 됩니다. 한자로는 잘도 번역되네요. 어찌 생각하면 한국어에서 요구되는 단어나 문장에 포함된 정보가 더 정교한 걸까요, 저의 모국어가 한국어라서 더 세밀하게 구분되는 언어정보에 민감한 걸까요. 원서라고 하지만 이탈리아어 작품을 영역한 것입니다.

 

하여튼 간에 신간에 대한 매스컴의 반응을 검색했더니 가디언지와 파리 리뷰에서 관련 정보를 찾았습니다. 전자는 서평이고 후자는 동 제목의 강의전문이었습니다. 일부 번역해서 옮겨봅니다  다음은 가디언지 기사 일부입니다. 

“within books, experience is always possible… its reach does not extend beyond the blank margin of the page”. The external world, meanwhile, remained to him a stubborn and unpredictable mystery, one that never stopped “surprising me, frightening me, disorienting me”. This predicament, Calvino argues, was particularly stark for an Italian. His was a country that in its politics refused beginnings and middles and endings, a place “where many mysterious things happen, which are every day widely discussed and commented on but never solved; where every event hides a secret plot”. 

칼비노는 "책 안에서 경험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 범위는 페이지의 빈 여백 너머로 확장되지 않는다"며 한편 외부 세계는 그에게 완고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스테리로 남아 있었으며, "나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하고, 방향을 잃게"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칼비노는 이러한 곤경이 이탈리아 사람에게는 특히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주장합니다. 이탈리아는 정치에서 시작과 중간, 끝을 거부하는 나라로, "매일 많은 미스터리한 일들이 일어나고 널리 논의되고 논평되지만 결코 풀리지 않는 곳, 모든 사건에 비밀스러운 음모가 숨겨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Calvino’s eventual response to a Liberation special on “why do you write?” becomes a meditation not only on his restless doubts (“I write because I’m dissatisfied with what I have already written and would like in some ways to correct and complete it, offer an alternative”) but also a kind of deconstruction of the unconscious strategies of the creative process: “I have the thought: Ah! How I’d like to write like X! Too bad it’s completely beyond my capabilities! Then I try to imagine this impossible undertaking, I think of the book I will never write but would like to read, to put beside other beloved books on an ideal shelf. And suddenly some words, sentences appear in my mind…”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Liberation지 특집에서의 칼비노의 최종 답변은 그의 불안한 의심("내가 이미 쓴 글에 불만족스러워서 어떤 식으로든 수정하고 완성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에 대한 명상이 될 뿐만 아니라 창작 과정의 무의식적 전략을 일종의 해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렇게 쓰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그것은 내 능력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그런 다음이 불가능한 사업을 상상하려고 노력하고, 결코 쓰지 않을 책이지만 읽고 싶은 책을 생각하여 이상적인 선반에 다른 사랑하는 책 옆에 놓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어떤 단어, 문장이 내 마음에 나타납니다..."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23/jan/10/the-written-world-and-the-unwritten-world-by-italo-calvino-review-exquisite-flights-of-imagination

아래 링크의 파리 리뷰 웹페이지에는 이 책의 119페이지부터 130페이지에 있는 책과 동명의 강의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일부러 스탠포드 대학에서 꼽아서 재언급한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The Written World and the Unwritten World 

1983년 3월 30 뉴욕대, 제임스 렉처.

https://www.theparisreview.org/blog/2023/01/05/the-written-world-and-the-unwritten-world/

 

(쓰기) 불가능한 책을 쓰는 것에 대해

 

 

 

In a lecture delivered in New York in the spring of 1983, Italo Calvino remarked that ‘most of the books I have written and those I intend to write originate from the thought that it will be impossible for me to write a book of that kind: when I have convinced myself that such a book is completely beyond my capacities of temperament or skill, I sit down and start writing it.' 

내가 쓴 책과 앞으로 쓸 책의 대부분은 내가 그런 종류의 책을 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책은 내 기질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앉아서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딮엘 번역)

https://bookhaven.stanford.edu/2014/10/03/ 

칼비노 자신이 언급했고 딮엘 번역으로 보면 이 책의 한글 제목은 '(내가 혹은 남이) 쓴 세상과 (내가) 앞으로 쓸(쓰고 싶은) 세상'이 맞겠네요. '쓴 세상과 쓸 세상'도 이상하고 칼비노의 의도로 보면 '불립문자를 쓰고 싶다'인데요. '모든 씌여진 세상(책)들과 아직 써지지 않았지만 쓰고 싶은 세상' - 이러면 너무 길어서 낭패죠. 

 

첫 에세이인 Good Intention을 읽어봤습니다. 어디서 본 것 같이 익숙한데 전에 읽지 않았다고 치면 책에 대한 평소의 생각이 제가 하는 행태와 너무 비슷하고 예전에 유시민 작가의 집에서 작가가 그랬듯 이 곳 저 곳에 책을 널어놓은 행위도 씌여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신간을 우연찮게 빌렸는데 이 책은 이북으로 구입을 해야겠습니다.

 

이탈로 칼비노의 책은 나중에 즐겨 읽을 책으로 모아놓고만 있는데요. 문장이 전체적으로 어렵지는 않지만 보석같은 단어가 가끔 튀어나옵니다. 영역이라 하더라도 아마 원문을 살렸겠다는 심증이 가는 단어들의 조합이죠. 한강 작가의 소설을 보면 영역자의 힘이 돋보이는가 하면 파친코의 경우처럼 이민자의 영어가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르헤스나 칼비노처럼 영어권 작가가 아님에도 영역 작품이 돋보이는 것은 다른 모든 장점들과 더불어 (제 생각) 고전작품들에 대한 감상을 공유하고 나아가 언어구사에 있어 라틴어나 프랑스어 스페인어등(모두 라틴어에서 비롯)의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문장을 신선하고 신비롭게 만드는 단어들을 보석처럼 박아놓는 특징 때문 아닐까 합니다. 이런 경우 (영역에 해당) 번역자 입장에서는 거저먹는 번역(아, 너무 싸게 말했나 싶지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또 다른 에세이 한 편이 텔레그라프 지에 게재되어 있는데 번역에 관한 내용입니다. 내용이 좋아서 읽다가 급히 추가합니다.

 

텍스트 번역은 그 텍스트를 제대로 읽는 법 - 이탈로 칼비노 

Translating a text is the true way of reading it

1982년 6월 4일 로마에서 열린 콘퍼런스(Bollettino d'informazioni 32, no.3 Sep-Dec 1985 게재)에 발표된 글입니다. 에세이집에는 88페이지부터 95페이지에 동명의 에세이가 실려있습니다.

https://www.telegraph.co.uk/books/non-fiction/italo-calvinos-guide-translation/ 

 

칼비노가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이탈리아- 영어 번역 콘퍼런스에서 발표한 이 글은 번역과 원문의 차이에 대한 칼비노가 발견한 부분들을 비교적 일반화해서 표현했습니다. 밀란 쿤데라도 비슷하긴 했었는데 구체적 예를 들었고 매우 민감하게 대처했었습니다. 이 태도가 왜 다른가 했더니 밀란 쿤데라는 알파벳 계열 언어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로 번역된 결과를 들었었고 칼비노는 영어, 프랑스, 스페인 정도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비노의 글에는 번역에 대한 우리(한국인)의 어려움 또는 고민과 공감하는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https://www.goodreads.com/book/show/28637.The_Art_of_the_Novel

 

알파벳 계열 번역에서조차 칼비노가 제시하는 심각한 의미 변질이 있으니 한국어로의 번역에는 얼마나 많은 의미 손실이나 변질이 있을까요. 비록 이탈리어 원작의 알파벳 언어 간의 번역에 대한 내용과 이탈리아어에 한정한 글로 마무리되긴 하지만 얼마든지 '번역'이라는 개념에도 통용될 작가의 경험입니다. 특히 발터 벤야민의 번역가의 책무와 같이 읽으면 음미하게 될 말이 많이 나옵니다.

 

발터 벤야민의 '번역가의 책무' 한글 번역을 찾아서 링크합니다.

  

번역가의 책무(1/3)

https://generallylucky.tistory.com/303

 

번역가의 책무(2/3)

https://generallylucky.tistory.com/307

 

번역가의 책무(3/3)

https://generallylucky.tistory.com/311

 

 

 

 

님의 서명
인생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 하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써야 하고, 고통 받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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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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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5 06:15:44

현재완료와 미래완료는 어떨까요?

완료형이라는 시제 자체가 한국어에는 없기때문에 표현되기 어려운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WR
Updated at 2023-05-25 09:24:50

쿤데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번역된 자신의 작품에 혀를 내둘렀다고 썼었죠. 칼비노는 알파벳 언어끼리의 번역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아니지만 묘한 뉴앙스의 차이, 감정선의 무뎌짐 같은 애써서 쓴 섬세한 표현이 번역에서 무기력해지는 부분을 토로했고 그런 부분을 잘 살리는 번역가를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한국 번역물에서 그런 부분을 많이 봤었기 때문에 칼비노의 심정(작가로서 어쩔 수 없는)을 잘 이해한 측면도 있습니다. 아래 댓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번역도 창작의 영역이 있기 때문에 번역가의 고민에 많이 의존적이기도 합니다. 칼비노는 이에 대해 '질문이 없는 번역가는 좋은 번역을 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1
2023-05-25 06:24:09

번역은 제2의 창작이다 라는 식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출근준비 해야할 분주한 시간대라 벤야민의 글들을 깊이 읽어낼 수 없지만 볼수록 흥미가 생겨나는 분이군요

1
Updated at 2023-05-25 08:50:16

 말씀하신대로 written과 unwritten이 완료형이라면 종(終)문계와 미(未)문계는 어떨까 싶습니다^^ '헤어질 결심'을 참고해서 쉬운 한국어로 '씌여진 세계'와 '씌여질 세계',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겠고요. 한편으로 한국어에는 한자어 文에 대응할 좋은 단어가 있죠, 어디에나 쉽게 적용이 되는 '글'이라는 단어가 말이죠 ㅎㅎ 文이 좀 닫힌 느낌이라면 글은 열린 느낌이라고 하면 좋을까요, 예를 들어 文이 written의 어감이라면 글은 writing의 어감이라고 해도 좋을 듯 합니다. 그래서 '글'이라는 단어를 활용하면 '글이 된 세계'와 '글이 될 세계',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다시 번역의 문제(?)입니다만, 모든 글은 가능하면 원문으로 읽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특유의 어감이라든가 어떤 한 언어에서 어떤 한 한 단어가 생성된 유래 등도 있기 때문이겠죠. (동북아 언어에서는 한자어로 된 단어들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씩 곱씹어보면 우리가 쉽게 쓰는 한자어 단어들은 결코 영어처럼 읽히고 이해되면 안되겠죠^^;;) 곁가지입니다만, 뮤지컬은 왜 꼭 번역해서 공연하는지 전 잘 이해가 안되더라고요, 베르디의 오페라를 이태리어가 아닌 한국어로 부른다고 상상하면 영 오그라드는데 말이죠. (영화는 더빙이 아니라 자막으로 보는 게 일반화되어 있는데 말이죠 ㅎㅎ) 앞에 댓글에서 니코데무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어에는 완료형이 없겠죠, 그런데 일본어 고급 문법에서는 일본어에도 완료형이 있다고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만, 완료에 대한 상(相)이 잘 그려지지 않는 한국어 native speaker로서 전 좀 어거지스럽다고 생각하긴 했지만요^^;; 이건 저의 어거지스러운 상상입니다만 한국어에 완료에 대한 상(相)이 없다는 게 완료가 있는 언어와 그 언어 사용자들에 비해 하나의 특성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서예의 필체나 수묵으로 그린 정물화나 풍경화들을 보면 쓰다 만 듯하고 그리다 만 듯하죠. 반드시 완료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늘 진행중(?)이라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나 싶습니다. 전에 MOMA에서 보셨던 데 쿠닝과 폴락의 추상표현주의 회화가 비슷한 느낌이겠죠, 다 그린 건지 그리는 중인지 그리다 만 건지ㅎㅎ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슈베르트의 unfinished symphony도 미완이기 때문에 매력이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나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기형도 <빈 집> 중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쉽게 씌여진 시> 중

 

잘 읽었습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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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05-25 09:47:54
칼비노가 말씀하신 것과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연찮게 최근에 바르뜨, 벤야민, 칼비노까지 번역에 관한 담론을 자꾸 접하게 됐는데 번역 또한 문학의 한 영역으로 번역가가 시인과 같은 역할을 해야한다는 말을 황현산, 바르뜨, 벤야민, 칼비노까지 비슷하게 언급합니다.

언어를 일상어와는 다른 차원으로 이해하고 담금질하고 엮는 작업을 하는 시작업 처럼 번역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원의에 가까워지겠죠.

오페라 이야기 잘 하셨습니다. 오페라 자막이 반복되는 부분은 공백처리되듯 오페라 감상은 서사의 드라마적 감동과 함께 노래로 전달되는 예술적 감응 또한 감상요소이기 때문에 원어로 느끼는 게 맞다고 합니다. 줄거리와 대사의 이해와 반복감상은 필수적이겠죠.

번역 담론에 골몰하던 때 돈조반니 감상과MOMA에서 그림을 보며 그 모두가 인간이 인간에게 무엇인가 의미를 전달하려는 시도가 아닌가라는 전제를 이해하게 됐습니다. 추상화도 마찬가지죠.

엊그제 영화게시판에 별로였다고 후끈 달아올랐던 영화 컨택트(영제 Arrival, 원작: 테드 창 -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문어외계인이 의사를 전달하는데 역사와 메타정보까지 담긴 사차원의 언어를 구사하는 장면이 나오죠. 황현산 선생의 영화감상기를 읽고 크게 감동해서 제가 글도 썼었고요.

꼭 외계인의 사차원 언어가 아니어도 인간끼리도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을 추상화로 의미전달하는 것이고 오페라의 음율로 전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언어와 언어 간의 번역이 그 나마 제일 뚜렷하게 대응하는 상대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런 의사전달의 기호를 연구하는 게 기호학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았던 의미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죠. 그래서 예술이나 번역에 대한 글들을 쓰는 사람들이 기호학 언저리에 많은 것이겠고요.
 
일신 우일신, 매일 새로 배우니 즐겁습니다^^
 
기형도 전집을 가지고 있는데요, '잘 있거나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에 가슴이 에이네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에서 시인의 그 사랑이 제가 연상하는 그것과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지만 시 자체로 가슴이 에이는 느낌을 주는 것, 칼비노나 벤야민이 이야기한 번역이 지향해야 할 경지가 이런 것이겠죠. 
 
감사합니다.
1
Updated at 2023-05-25 11:03:52

다음주에 예술의 전당에서 돈조반니를 공연합니다만, 한국에서 3시간 짜리를 그대로 공연할리는 없겠죠ㅠㅠ (발레도 축약버전이 있다면 항상 그걸로 하더라고요;;), 전체 시간이 140분으로 나오는 걸 보면 1시간30분짜리 축약으로 공연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도 한국 정서상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인지(?) 자주 올려지는 작품이 아니라서 예매해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테드 창의 원작도 좋았고 영화 컨택트도 좋아하는데요, 영화 게시판에 가서 읽어봐야겠습니다!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 시집은 자주 마시기에는 부담스러운 독한 위스키 같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시는 산문으로 쓰지만 전집에서 다른 산문에까지 재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기형도 역시 '슬픈 천명이 시인'인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전혜린 이후 요절한 작가의 계보를 이어 갔기도 하고요. 종종 기형도의 여러 시들을 '길 위에서 중얼거리게' 되지만 전 시작 노트의 이 구절을 좋아합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아래 부분은 제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을 때, 한강도 무의식적으로 비슷한 형상을 떠올린 것 혹은 한강이 기형도를 오마쥬한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한강씨도 연세대 출신이니까요^^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 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울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언어도 일종의 기호겠죠, 우리가 보는 세계는 온통 기호 뿐이라서 라캉이 '성관계는 없다'라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 그럼 우리의 판타지는 어게에서 충족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제가 또 다른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아주 유명한 장면이 있습니다. 카일 맥라클란이라는 주인공 남자가 옷장에 숨어서 또 다른 주인공인 데니스 호퍼와 이사벨라 로셀리니간의 정사를 지켜봅니다. 일반적인 정사에 대해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흥미로운 상황이 연출됩니다. 정사 중에 호퍼가 산소 호흡기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숨이 찬거죠. 

프랑스에 '미셸시옹'이라는 영화 음향 이론가가 있습니다. 그가 이 장면을 기가막히게 해석했는데요. 아이가 부모의 모습을 상상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성행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던 아이에게 부모의 거친 숨소리는 아이에게 어려운 상상이죠. “아빠가 산소호흡기를 사용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겠죠. 엄밀히 말해 이러한 생각은 인간들의 유아기 성시기의 상상력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유아기에 가졌던 성판타지를 잊고 평범하고 동물적인 성관계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에대해 라캉은 “진정한 성관계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을 판타지의 연결고리로 본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판타지가 유지되어야 성관계도 유지 될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특강 - 제1강 섹슈얼리티를 위하여 중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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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5 10:45:09
뉴욕  돈 조반니의 피날레는 가히 압권이었습니다. 기술 발달에 힘입어서 더욱 지옥스럽습니다.

영게는 호불호 댓글의 줄다리기라 그리 즐겁지 않으실 겁니다.

기형도 시작메모가 333페이지에 있고 334페이지에  있는 부분이 오늘 칼비노의 Written and Unwritten과 맥을 같이하네요. 게다가 기형도 시인의 첨언이 시인과 번역가 공통의 불행한 쾌락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고요^^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 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에 씌어진 부분과 씌어지지 않은 부분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두번째 부분이다. [......]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 수 밖에 없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며 이러한 불행한 쾌락들이 끊임없이 시를 괴롭힌다.

The weird라는 SF모음집을 보다가 한강의 '작별'의 소재와 너무도 비슷한 것을 읽어서 그의 독창성에 대한 생각을 좀 접고 '완성도'를 음미하자로 태도를 바꿨는데요. 정말 두 문장들이 분위기가 비슷하네요.

아, 저는 지금은 한국 전화가 없어 어게를 들어가지 못하는데요, 질펀한 모든 성인문화가 내게 개방된 곳에 사는데 어게를  못 가면 어때 하고 괘념치 않았었습니다. 그 때는요. ㅠㅠ

지젝은 저도 감탄하며 읽게 되는 문장들인데요 소개 감사합니다. 

보고 배우는 것이 거의 다 아닐까요? 우리는 밥상을 뒤없는 장면을 보고 그것을 따라하게 되는 악습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김치로 뺨 때리는 막장 드라마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평균을 끌어내리는 결과를 가져오죠.


1
2023-05-25 10:26:37

미완성 교향곡 이야기를 하시니 저는 자동으로 브루크너 9번이..
그간 발견된 여러 습작이나 관련 자료들을 모아 4악장을 누군가 제안했고 아직도 그와 관련된 토론?이 계속 되는가 봅니다

끝나지 않았으니 끝내야 하는가? 라는 질문 역시 답은 없겠지요 완료 될 것이 확실하지만 아직 완료되지는 않은.. (하지만 완료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시제가 우리 말과 글에 없었으니 시제관련 문제에 유독 약할수밖에 없겠지만 우리의 문화와 정서에서 이미 끝나지않았지만 이미 끝난것과 진배없는 그런 상황은 이미 자연스레 체험하며 살고 있겠지요 그래서 쓰는 언어구조에 맞춰 생각의 틀도 달라진다는.. 구조주의 철학의 그 어려운 개념이 요즘 사알짝 느껴지기도 합니다 헛다리인지 모르겠지만요

2023-05-25 10:34:06

언어는 존재의 집이겠죠^^

 

브루크너의 9번은 8번을 볼 때, 마치지 못한 것이 좀 아쉬운 측면은 있습니다, 반면 말러의 10번은 1악장에서 끝내는 게 나았다고 봅니다, 1악장만 들어도 그 뒤에 뭐가 더 씌여졌을지 겁나기도 하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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