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90년대 초 대학가 불심검문의 웃픈 추억
80년대 후반 만큼은 아니지만, 연세대 사태 이전 90년대 초중반까지는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고,
각종 시위도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각 학교 차원에서 하는 시위 외에도 여러 학교들이 모여서 하는
연합시위 등이 벌어지면 평소보다 시위도 격렬했고, 학교 등교길에 경찰, 전경들이 불심검문을 하는
경우도 빈번했지요.
실제 불심검문에 잡혀갈만한 핵심 열혈 운동권 학생들은 그런 것들을 잘 피해서 다녔고, 정작 검문에
걸리는 것은 그냥 (학생운동이라기 보다는) 과 학생회나 동아리 활동 수준에서 당시 기준의 불온도서
들고 다니다가 가방검사로 잡히는 경우가 다반사.... 뭐 거의 대부분 훈방이지만요.
군대 가기전이니 90년대 초반으로 기억합니다. 92년 또는 93년쯤.... 오전 등교하느라 신촌역 출구를
나서는 데 전경들이 쫘악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지하철 출구쪽에 같은 과 친구 두명이 보이는데,
둘 다 전경들과 실갱이를 벌이고 있는 중..... 가방검사를 당한 모양입니다.
당시 사회과학서적의 경우 영화 변호인의 장면처럼 경찰의 자의적 기준으로 불온도서로 지정해서
(이미 검열을 통과해서 정식출판된 책이라도) 불심검문 같은 것으로 그런 책을 가방검사에서 들키면
좀 귀찮아 지는 세상이었지요. 그런데 그날은 좀 웃긴 일이 발생합니다.
- 친구 1은 나름 학생운동에 열심인 친구였는데, 가방 속에 무려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과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안토니오 그람시 책이 들어있었고... (아마 옥중수고였나 가물가물 ㅎ)
- 제 가방 속에는 강의 레포트 때문에 읽고 있던,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이
들어 있었는데............. 친구 1과 저는 무사통과 ? 어 ?
친구 2는 학생운동과는 전혀 거리가 먼 강남 부유한 집 출신 Geek 타입의 공부벌레였는데,
그 친구 가방에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투쟁이라는 단어 때문에
다른 친구와 저까지 포함해서 아 그 책은 이념서적 아니라고 설명을 해도, 그 전경이 가방끈이
좀 짧았던 건지... 막무가내로 붙잡고 안 놔주는 사태가.... 상관이 올 때까지 기다리다 가야한다고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잡아두었던.... 학생증 보여주고 해도 소용이 없더라구요.
그 친구는 그날 뭐 경찰서까지 간 것은 아닌데, 마포서 담당자 (아마도 정보과 형사)가 올 때까지
한참을 잡혀있느라 오전 수업에 못들어 왔고, 하필 그날 교수님이 Qizz를 보는 바람에 퀴즈시험을
못보는 사태까지... ㅠㅠ
정작 더 좌파스러운 책을 가지고 있던 친구 1과 저는 제목이 무난해서 그냥 통과되고, 이념적으로
좌파 쪽과 전혀 관계없는 책을 가지고 있던 친구 2는 애꿎게 잡히던 웃픈 에피소드 였습니다.
더구나 친구 1이 가지고 있던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저자가 영어로 적혀있기는 했지만,
분명히 V. I. Lenin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이라고 적혀있는데도 말이지요
* 주민등록증이 바뀌기 전 구형일 때 이름이 한문으로만 적혀있어서 검문 때 한자를 잘 못 읽는
경찰들의 경우, 검문하면서 피검문자에게 이름 ? 하고 물어봤지요. 그럼 오기가 난 학생들의 경우
아 ! 거기 다 써있잖아요 ? 못 읽어요 ? 하면서 개기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도 하던 시절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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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제수하던 시절 하숙집에 고시 준비하던 법학과 형님이 불시검문 걸리면 ‘경찰관 직무집행법 3조’에 현행범이 아닌 시민은 검문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암튼 그거 듣고 어설프게 외우면서 나중에 걸리면 써먹어야지 하는 어리숙함을 보였죠. 뭐 실제 검문 걸린적은 없지만 만일 걸렸더라도 그렇게 말했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