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강제 병합함에 따라 다시금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에 대한 위협이 한껏 끌어올려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예전 쿠바 미사일 위기 때처럼 굳이 핵무기를 전진 배치하는 퍼포먼스를 안 해도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쏴버리면 되니 정치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이 되는 지점까지 온 거 같습니다.

이걸 보니 생각나는 냉전 시대 자체를 소재로 삼아 만든 보드게임이 있습니다. 미국의 워게임 전문 레이블인 GMT사에서 만든 <황혼의 투쟁>이라는 게임입니다. 사실 이 게임은 보드게임 좀 아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보드게임계의 걸작으로 공인된 게임이죠.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소련이 붕괴되는 1989년까지를 배경으로 삼은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미국과 소련 둘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 예를 들어 캠브리지 스파이 5인방 사건, 마셜 플랜, 인도-파키스탄 전쟁, 우주 개발 경쟁, 체르노빌 사태 등의 내용을 카드로 펼쳐 놓으며, 그 카드에 적힌 내용에 따라 전 세계 각 국가에 미국의 영향력, 혹은 소련의 영향력을 심어둡니다. 그 영향력을 타이밍별로 점수화하여 마지막에 종합한 뒤 점수가 높은 쪽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물론 이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승리 요건이고, 이것 외에도 승리 요건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그리고 영향력만 단순히 놓는 게 아니라 각 국가에 정치력을 발휘해서 자신과 상대의 영향력을 조정할 수도 있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전투 행위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향력 게임이지만 워게임 쪽으로도 분류됩니다. 보드게임으로는 보드게임긱에서 수년간 1위를 차지했던 게임이고 이후에 스팀용과 모바일 앱용으로도 나왔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UvOx4exWJQ

역사 보드게임은 초등교육 현장을 중심으로 지금도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역사 보드게임들이 부루마블식이거나 카드식의 단순한 구조이지만 이 게임은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시스템 디자인과 훌륭한 밸런스, 배경이 되는 정보와 그 해석의 깊이가 깊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제국의 입장이 되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 게임에서 승리 요건, 혹은 패배 요건 중 하나가 또 매우 현실 반영적이고 지금의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시되는 국가들 중에는 냉전이 유독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장국가'들이 있습니다. 이 전장국가는 그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승리 점수 계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고 이곳에서 군사행동을 일으켜 성공하면 영향력을 높이면서 승리 점수를 얻을 수 있지만 대신 데프콘 레벨이라는 조건이 즉시 -1이 됩니다. 그리고 이 데프콘 레벨이 -5가 되면 핵전쟁이 터지면서 게임이 바로 종료됩니다. 즉 전장국가에서 자기 점수 올린다고 신나게 군사행동을 하면 그 군사적 긴장감이 극대화되어 핵전쟁이 터질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데프콘 레벨을 -1을 더해서 핵전쟁을 일으킨 쪽, 바로 마지막으로 전장국가에서 군사 행동을 일으킨 쪽이 패배한 쪽이 됩니다.

그러므로 반대로 생각하자면, 플레이어는 머리 싸움을 통해 상대방에게 전장국가에서 군사 행동을 일으키게끔 강요하게 만드는 것 또한 자신이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핵전쟁이 터진 다음에는 더 진전할 것도 없이 게임은 끝나버립니다. 이런 것도 여러모로 치밀한 현실 반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