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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존 르카레의 오너러블 스쿨보이 간단 감상평(스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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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9-10 07:05:10

 

 

 

 

 

 

  최근 번역되어 출간된 존 르카레의 소설 『오너러블 스쿨보이』를 오늘에야 1회차 완독했습니다. 이 소설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스마일리의 사람들』 사이에 위치하는 , 속칭 "카를라 삼부작(Quest for Karla Trilogy)"의 두 번째 이야기이자 중심을 잡아주는 소설입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퇴출된 정보부의 2인자 스마일리가 이중간첩을 색출하고 다시 정보부에 복귀하는 과정을 다뤘다면, 2편은 홍콩을 통해 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소련 정보부의 작전을 분쇄하는 동시에, 연루자들에 대한 체포작전 과정을 그립니다.( 후속작 『스마일리의 사람들』은 모스크바 센터의 수장 카를라를 직접 겨냥한 작전 이야기고요.)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은 카를라 삼부작의 다른 작품들과 결이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이 삼부작의 주인공 격인 조지 스마일리가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작품을 통틀어 "서커스(영국 정보부)"에 적을 두고 작품이 진행되는 "유이한" 소설이며 그가 정보부의 수장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어로 번역된, 존 르카레의 소설중 스마일리가 등장하는 작품은 총 6편인데(미번역 작품포함 9권), 그는 최초 등장이었던 『죽은자에게 걸려온 전화』이후, 정보부를 사직하거나 퇴출되고 복귀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소설의 시작에서는 늘 정보부의 외부인 신분이었습니다. 아마도 르카레의 소설이 첩보 업무 자체에 대한 회의를 담은 것이다보니 주인공인 스마일리가 정보부와 거리를 두고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 윤리적으로 보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나 전편에서 "두더지(이중간첩)"를 성공적으로 색출하고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정보부에 복귀한 스마일리는 자의반타의반으로 정보부 1인자가 될 수 밖에 없었죠. 원래 1인자였던 컨트롤은 사망했고, 쑥대밭이 되어버린 정보부를 정리하는 궂은 일을 누군가는 해야 했으니까요. 

 

 그 결과로 스마일리는 정보부가 위치한 런던에서 업무를 총괄하고, 실제 작전이 벌어지는 홍콩과 동남아 각 지역은 별도의 요원인 제리 웨스터비가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합니다.(웨스터비는 전편 팅커, 테일러에서도 잠깐 등장합니다. 동유럽에 파견되었던 기자 출신으로 스마일리의 탐문 대상었죠. 영화 TTSS에서는 원작에서 샘 콜린스가 맡았던 사건 당일 당직요원으로 나왔는데, 굳이 그렇게 바군 이유를 모르겟습니다. 샘 콜린스도 이 작품에서 다시 등장하거든요.) 원래도 스마일리는 현장요원보다는 데스크요원에 특화된 캐릭터이긴 한데, 그렇다고 스마일리가 현장을 전혀 뛰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슬쩍 등장하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서는 정말 잠깐 등장하지만 정식 요원이 아닌 고문 신분에도 불구하고 해외 파견임무도 마다하지 않죠. 하지만 이번 작전은 워낙 복잡한데다가 미국 정보부와의 조율, 영국 국내 첩보 수집 등의 업무와 함께, 정보분석가들과 함께 지휘센터를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스마일리는 온전하게 본국에서 데스크 업무에만 집중합니다. 그리고 스마일리의 손발이 되어 현장을 뛰는 주인공 한 명이 더 등장하죠. 이들의 이중주는 유기적이지만 주인공들의 업무량이 많기도 해서, 서로 독립적으로 상당한 분량을 가지고 진행됩니다. 때문에 카를라 삼부작 중 가장 긴 소설(1000페이지)이고, 르카레의 전 작품으로 범위를 넓혀도, 이보다 더 긴 작품은 자전적 요소가 강한 『완벽한 스파이』(1400페이지)말고는 없습니다. 

 

 스마일리와 동남아 파견나온 제리 웨스터비의 탐문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들은 효율적인 정보추출을 위해 정교하게 계산된 기술이기도 하지만, 등장인물 개개인의 비극적인 삶과 내면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예술이기도 합니다. 카를라 삼부작 중 문장이 가장 원숙하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원치 않지만 재능과 필요에 의해 첩보전에 휘말려서 내면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게 되는 매력적인 여성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후에 쓰여진 『리틀 드러머 걸』 주인공의 원형이 발견되기도 하고, 르카레가 깊이 영향을 받은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에 등장하는 커츠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도 등장하는 등, 인물의 형상화 측면에서도 흠이로운 구석이 많습니다. 르카레 평생의 주제인 허영심과 속임수의 화신인, 르카레 본인의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보이는 인물들도 등장하고요. 그래서 이 소설 역시 작가의 자전적 요소로 가득한 작품입니다. 

 

 단 한가지 아쉬운 구석이 있다면,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사건의 전개가 거의 있을 법하지 않은 우연에 기대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정말로 큰 의외였습니다. 르카레의 소설에서는 우연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은 그 우연을 겪은 인물들이 모르게 미리 철저하게 계산된 상황이거든요. 우연을 용납하지 않고 정교하게 진행되는 첩보전의 성격상,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르카레의 소설을 열 편 이상 읽었지만, 주요 사건과 작전의 전개가 우연에 의해 진행되는 작품은 이 작품이 유일합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전말을 모두 알고 날 때까지, 그 우연적 사건에 뭔가 흑막이 있었을 것이라는 예측을 포기 하지 않았는데, 별다른 해명이 없어서 좀 실망스러운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래 현실이라는 것은 소설보다도 더 기이한 구석이 있어서, 그런 우연성이 얼마든지 현실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혹 제가 소설의 내용을 미처 다 파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르카레의 소설은 아주 섬세하게 읽어야 전모를 겨우 다 파악할 수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또 이런 문제들을 감안해도, 충분히 흥미진진하고 읽을만한 소설입니다. 무엇보다 르카레의 모든 소설을 통틀어도, 이보다 더 복잡하게 진행되는 작전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 단 하나의 우연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면, 제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은, 카를라 삼부작 중 최고의 소설이고, 르카레 최고의 작품이고, 다른 작가들로부터 불멸성을 인정받은,  『완벽한 스파이』에 버금가는 작품입니다.  베토벤의 교향곡에 비유한다면 6번 교향곡 같은 작품이라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단 하나의 실수를 관대하게 넘긴다면 반드시 읽고 넘어가야 할 최고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 르카레 소설의 번역자가 제각각이라, 작품 전체에 걸쳐서 통일되지 않은 점들이 있어서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인물명의 음역이 통일되지 않은 것인데요. 이를테면 정보부의 최종 결정권자인 내무부 차관인 Oliver Lacon의 이름은 작품마다 레이콘 라콘, 레이컨으로 다양하게 불립니다. 전 정보부장의 코드명인 '컨트롤'은 국내 번역된 모든 『추운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3종)에서 '관리관'이라는, 직책을 나타내는 표현인것처럼 번역되고요. 코니 삭스는 색스로도 불리는 등 통일성이 다소 아쉽습니다. 

 

또 하나는 존대의 표현인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샘 콜린스는 바로 앞 작품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는 스마일리와 상호 하대를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존대를 합니다. 코니 삭스도 삼부작 중 두 편에서는 스마일리에게 존대를 하지만 나머지 한 편에서는 오히려 스마일리가 존대를 하죠. 이런 부분들이 전체 번역에서 꼼꼼하게 따져지지 않은 것이 다소 아쉽습니다. 그나마 이번에 나온 『오너러블 스쿨보이』가 존댓말 표현 문제에 있어서는 가장 오류가 적습니다. 앞으로 최소한 20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지만, 만약 르카레의 소설들이 개정판들이 나온다면 이러한 오류들이 바로잡히면 좋겠습니다. ㅎㅎ

 

https://youtu.be/mG8b7Y7le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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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2-09-09 01:45:53

 이북으로 구입해놓고 하얼빈을 먼저 읽느라 아직 읽기 전인데 rockid님 글이 

리더기 전원을 누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네요, 막연히 카를라 삼부작 중 가장 처져서 

그동안 출간이 안됐었나 싶었는데 TTSS와 스마일리의 사람들에 비견될만한 소설이라

하시니 묘한 안심이 됩니다, 추석 연휴동안 읽어야겠네요.

WR
Updated at 2022-09-09 01:50:23

전 오히려 만족도가 3부작 중 가장 나았고, 이보다 더 재미있는 작품은 완벽한 스파이 정도였습니다. 그 문제의 우연을 제외하면요. 읽으시고 꼭 글이나 댓글 남겨주세요. 그 우연에 대해서 읽으신 분들하고 이야기를 한 번 나눠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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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9 01:58:27

사실... 제가 완벽한 스파이 앞부분을 읽다 중도 포기한 상태라...

르 카레옹 팬이고 작품들 초반 진입 장벽이 높다는 것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한 스파이는 유난히 그 진입 장벽이 높은 느낌이였습니다.

rockid님이 완벽한 스파이를 르 카레옹 최고작이라 성찬하시니 오너러블 스쿨 보이를 다 읽고 

완벽한 스파이도 재도전 해봐야겠습니다. (원래는 카를라 삼부작을 다시 읽는 계획이었지만요...)

오너러블 스쿨 보이 읽고 말씀하신 그 "우연" 에 대해 의견 댓글로 남기겠습니다. ^ ^ 

WR
2022-09-09 02:01:15

감사합니다.^^

WR
2022-09-09 02:03:30

제가 예전에 완벽한 스파이에 대한 리뷰를 남긴 적이 있습니다. 이것도 스포는 없으니, 한번 읽어보시고 작품 접근에 참고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https://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22914366&series_pag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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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9 02:09:04

리뷰 읽고 참조하면서 완벽한 스파이 재도전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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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9-09 08:39:12

존 르 카레는 오래 전에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만 읽어봤습니다.

많은 호평을 받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이것도 읽어봐야겠어요.

 

저는 마틴 크루즈 스미스의 '고리키 파크'를 막 읽기 시작했습니다.

냉전 시대의 소련 수사관 얘기라니 느낌이 특이하네요.

WR
2022-09-09 08:37:21

고리키 파크도 냉전 시기에 쓰여진 작품이네요. 즐거운 독서 되시고 재밌으면 감상평 올려주세요.^^

르카레의 카를라 삼부작은 순서대로 읽어야 합니다. 2,3편에 1편의 결말에 대한 정보가 너무 많아서요. 물론 영화를 보셨으면 순서에 상관 없이 읽으셔도 괜찮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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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9 08:48:53

아, 삼부작은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군요.

조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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