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신문에서 먼저 알게 된 아버지의 소식
현재 저는 멀리 미국에 살고있는 외노자 신세이고 부모님께서는 한국에 계신지라 전화라도 자주 드리려고 하지만 그게 또 그렇게 쉽지가 않은게 현실입니다. 다행히 아내가 자주 자주 시부모님, 즉 저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드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 전화는 대개 다음과 같이 끝나곤 합니다.
샴페인: “그래 좀 어떻게 지내신대?”
아내: “음… 괜찮으신 것 같아”
그런데 그 날의 대화는 조금 달랐습니다.
아내: “자기? 아버지께서 뭔가 기부를 하신 것 같은데?”
샴페인: “기부? 뭔 기부?”
인터넷 검색 기능이 없이 어찌 살았나 싶습니다. 아버지의 이름 석자와 직업, 그리고 기부라는 단 세개의 단어로 금방 어렵지 않게 신문기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몇년전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때도 이곳 미국에 있었던 저와의 전화통화에서 이제 당신은 나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지원을 충분히 다했고 혹시 본인에게 남은 재산이 있다면 우리 형제가 아닌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시고 그 증거로 유언장의 일부를 보여주시기까지 했습니다. 30대와 40대 초반을 꿈을 이루겠노랍시고 낯선 타국에서 공부를 할 때 여러모로 지원을 받았던 입장에서 진심으로 아버지의 혼신을 다한 지원을 몸소 느꼈었던지라 저도 당연히 그렇게 하시라고 기쁘게 말씀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오래전 대화의 결과가 신문에 나와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10억을 기부하셔서 장학재단을 설립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마도 신문기사가 이미 나와 있을 정도였으면 제법 한참전부터 추진되었던 일 같은데 아버지는 저희에게 특별한 말씀없이 진행하신 모양이었고 아내와의 전화통화에서 우연히 그 이야기가 나왔었던 모양입니다.
어렸을때부터 아버지는 정말 지독하게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지독하게’ 라는 형용사를 굳이 붙인 이유는 그 검소함의 강도가 꽤나 쎘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 20편짜리 시리즈를 통해 저에게는 정말 전무후무한 검소함을 보였던 한 사람의 다소 독특한 삶을 조명해 볼 기회를 가져보고 싶습니다. 문자 그대로 본인을 위해서는 정말 단 한푼도 쓰지 않으셨고 가족들에게도 극도의 아낌을 강요하시곤 했습니다. 가족끼리 함께 외식을 할 기회가 있을 때에도 본인은 가지 않으시고 달랑 어린 저의 형제만 보내셔서 저희 둘이 먹고 오면 계산은 아버지가 나중에 식당에 따로 하는 그런 독특한 형태의 가족 외식 아닌 외식이 저희에게는 일상이 되었었으니까요. 철이 없게도 아버지의 다양한 면에서의 검소함은 어린 시절의 저에게는 꽤나 불편하게 느껴지곤 했었습니다. 많은 DP 분들이 그랬을 것 처럼 저도 어린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이것 저것 지르고 싶은게 많았었고 아버지에게는 ‘그게 밥이 되니 쌀이 되니’ 하는 불멸의 논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에서 10남매나 되는 형제, 자매가 방 두개짜리 초가집에서 (그것도 한 방에서는 누에를 치는) 살고 고학을 하면서 자란 후 형제/자매 중 유일하게 전문직업을 가진 후에는 7명의 여동생 공부를 거의 혼자 다 뒷바라지한, 그런 자수성가 시절에 체득한 이제는 거의 본능의 수준에 다다른 그런 검소함으로 무장한 이가 바로 저의 아버지입니다 (덕분에 이 7명의 고모님들은 저와 제 아내에게 끔찍하게 잘 합니다).
반면에 딱 한가지 예외가 있었다면 자식들 교육에 관련한은 그 특유의 검소함을 거둬들이시고 저에게 정말 많은 기회를 허락하셨었고 덕분에 저는 대학 등록금 걱정없이 학교를 다니고 몇몇 동년배들이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누릴 수 있었던 특혜가 있었고 이는 지금도 가장 감사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아마 당신에게도) 제법 크게 느껴지는 액수를 기부하신 것을 보고는 평생 천원 한장도 아쉬워 하시는 당신의 모습으로 볼 때 무척 예외적으로 느껴지기는 했습니다. 나중에 이런 저런 뉴스나 입소문을 통해 소식을 듣게 된 지인들은 막상 함께 기뻐하기보다는 저와 제 처를 걱정해 주시기까지 했습니다. 괜찮냐구요. 아마도 뉘앙스는 어쩌면 자녀들에게 상속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돈들이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에 대한 섭섭함을 혹시나 저희가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와 저의 동생은 약속이나 한듯이 아버지께 소식을 알자마자 축하한다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이미 드린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부도 한가지 원인이 되어 아버지는 저의 고향이 있는 도에서 수상하는 ‘2019년 자랑스러운 XX인 대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역시 신문기사를 통해 알게 된 대상 선정이유는 장학재단 뿐만이 아니라 1978년부터 매일 새벽 2시까지 약국을 열어 밤늦게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을 도왔고 저도 몰랐던 매년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기부했던 것도 포함이 되어있더군요. 제가 살았던 도시에서 저의 아버지의 약국이 택시 기사분들에게 유명하다는 얘기를 어렸을 때 많이 들었었는데 그 늦은 시간에 문을 연 약국은 고향에서 우리 집이 유일하였기에 택시 기사님들이 많은 분들을 저희 약국으로 실어 날랐기 때문입니다. 이 약국은 2018년 1월 드디어 문을 닫았고 한동안 약국 이름을 그대로 단 채로 조개구이 집이 되어 인스타그램에 빈번히 등장하는 맛집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영광스러운 수상일은 오래전에 지인이 미국의 저의 집을 거의 십여년만에 방문하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는 날이 되어 안타깝게도 수상식에는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예전 이곳 프차에서도 소개한 저의 밴드를 통해 만난 자랑스러운 초등학교 동창들이 두명이나 저 대신 예쁘게 만들어진 저의 가족의 이름과 메세지가 새겨진 꽃바구니를 들고 (저희 것 하나, 초등 동창 명의로 하나) 시상식에 참가해 주어 못다한 불효를 조금이나마 대신해 주었습니다 (예전에 이곳에 올렸던 저의 자랑스러운 초등 동창들과의 이야기 하나는 아래 링크에 올려놓겠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시상식 사진에 정작 저희 자녀들이 없는 것이 너무나 죄스럽게 여겨지던 차에 올해 11월 처음으로 아버지가 설립한 장학재단에서 60명의 중/고/대학생들에게 첫번째 장학금 수여식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아내와 함께 급작스럽게 한국을 방문하게 된게 지난 11월 초였습니다.
누구라고는 얘기할 수 없지만 부의 비납세 증여 수단으로 이루어진 장학재단에서 이사장을 맡았던 누구의 아드님과는 달리 저는 장학금 수여식의 기념품 조차도 사정을 해야 받을 수 있는 처지였지만, 장학금 수여식에서 만났던 재단 임원님들을 통해 각 장학생들의 눈물 겨운 사연과 공정한 재단을 운영하기 위한 많은 분들의 노력을 직접 들어보니 새삼 감동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기부하신 장학금도 모 은행을 통하여 잘 관리가 되어 이자만으로 매년 60명의 장학생에게 장학금을 10년간 지급할 수 있도록 조치가 되었고 원 기부금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있도록 한 부분도 감탄스러웠습니다.
사실 마음 한켠에서는 겨울이면 기름 보일러 온도 셋팅을 최저로 맞추어 놓아도 워낙 추워서 보일러가 자동으로 가동이 되면 깜깜 새벽에도 거주하는 2층에서 지하실까지 속옷 바람으로 뛰쳐 내려가 강제로 보일러 전원을 꺼서라도 난방비를 줄이시는 아버지의 피같은 돈으로 만들어진 재단에서 엉뚱한 곳으로 기금이 전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막상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선배이자 후배이기도 한 장학재단 임원분들을 만나뵙고는 이러한 기우가 말끔히 가셨습니다. 그 분들에게 듣게 된 각자의 사연 응모를 통한 장학생 선발과정과 도 전체에 걸쳐 지역적으로 고루 배분하기 위하여 기울인 세심한 배려들도 존경할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장학금 수여식에서 직접 지켜봤던 60명 수여자들과 함께 한 그들의 부모님의 기쁜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갑작스런 한국 방문의 제일 큰 즐거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짧은 한국 방문 와중에도 제가 바쁘게 아버지를 도와드렸던 일 중의 하나는 혹시나 가능할지 모르는 아버지의 518 유공자 선정 여부에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시에 가장 인접한 규모가 있는 도시의 하나라서 각종 구호품을 챙겨들고 총성이 난무하는 현장으로 직접 의약품들을 들고 가셔서 부상자 치료를 도운 공로로 전두환 대통령에게 받았던 감사장을 왕성한 혈기 때문에 다 찢어서 내다 버리셨던 아버지가 지금은 당시의 공로를 입증할 결정적인 문서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 감사장에 대한 미련을 표하셔서였습니다. 당신 생각에는 본인이 유공자로 선정이 되면 국립묘지 등지에 묻힐 수가 있어서 자손들에게 당신의 묘소를 관리하는 번거로움을 줄여줄 수 있겠다 생각하셨답니다. 현재 아버지의 구호활동이나 감사장 수여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당시에 신문에 보도되었던 아버지의 기억을 토대로 제가 신문사에 연락해서 1980년 어느날의 기사를 찾는 것까지는 성공했거든요.
이제 미국으로 돌아와 일상으로 돌아온 저의 회사 책상에는 아버지의 장학재단 이름이 새겨진 탁상시계가 하나 놓여져 있습니다. 그걸 바라볼 때 마다 자신의 직업군에서 기부가 워낙 적어 본인이라도 솔선수범해 보겠다고 말씀해 주신 아버지의 결단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결코 그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하겠지만 아버지가 남기시는 가장 큰 유산인 당신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될 것 같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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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멋진 아버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