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스포츠) 15세 이상) 피의 향연, 베어 너클을 아십니까?
아마도 격투기를 가볍게 소비하는 대다수 라이트 팬들이라면, 이종격투기를 넘어 종합격투기 시대가 되면서, 격투기 경기를 보며 잔인함을 느끼는 그 임계치가 많이 올라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포츠화가 이뤄진 모든 격투기 종목이 그렇듯, 종합격투기의 수위란 것도 종목 초창기의 모습과 비교를 해보자면 아주 많이 소프트해진 형태일 뿐이죠. 당장 UFC도 초창기 종합격투기 룰에 따라 시행된 경기를 보면, 심지어 성기 공격까지 허용이 될 정도였습니다. 결국 스포츠란 건 돈을 벌어야 유지가 되고, 그래야 협회 중심으로 그 판을 키울 수 있는 법, 영화로 치면 같은 제작비 투입을 전제로 NC-17등급이나 R등급의 작품을 찍을 때와 G나 PG 등급 영화를 찍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각각의 수익을 떠올려보시길. UFC 등 여러 종합격투기 협회가 마치 NC-17->R등급처럼 폭력의 수위를 낮추기 위해 룰의 개정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유라 하겠습니다.
원시적 복싱 형태로 알려진 베어 너클. 실로 오랜만에 ‘임계치를 넘어선 격투기 경기’를 봤습니다. 진짜 터프하고 야만적이며 잔인함니다. 음지에서야 베어 너클과 같은 격투기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을 거라 가늠이야 했다지만, 이런 유형의 스포츠가 양지로 올라왔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네요.
적어도 미국에서 베어 너클은 1889년 이후 2018년이 되기까지 무려 130년 동안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스포츠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단 뜻입니다. 해서 베어 너클 경기는 주로 후미진 주차장이나 지하실 같은 곳에서 소수의 관중만을 둔 채 벌어졌습니다. 정식 스포츠화가 되기 이전 형태이기에 룰은 보다 헐거울 수밖에 없고, 그래서 TV로 중계가 되는 격투기 콘텐츠에 비해 수위가 엄청나게 높았습니다. 고백하자면, 살과 피가 한데 뭉쳐 터지고 뼈가 으깨지는 듯한 저 차지며 둔탁한 소리에, 또 무수히 때리고 맞으면서도 좀비처럼 상대를 향해 걸어가는 두 선수의 모습에 몸이 움찔움찔 반응하면서도 눈을 감을 수도 귀를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모순적이든 양가적이든 뭐든 결론은 저 지독한 폭력에 매혹됐단 것입니다. ‘만일 브로튼 룰(the Broughton Rules. 1743년 만들어진 최초의 복싱 규정)에 의해 경기가 진행이 된다면 폭력성이 어느 수위까지 올라갈 것인가’까지 상상해봤습니다. 베어 너클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격투기, 보다 자세히 말하면 현대적 스포츠 범위에 포섭이 된 다듬어진 격투기,의 형태가 아니었단 얘기입니다.
UFC 선수들인 엘리아스 테오도로와 미샤 커쿠노프가 길거리 버전 베어 너클을 보며 진지한 잡담을 나눕니다. “복싱을 좀 배운 선수들이다.” “거리 조절을 하는 것을 봐라.” “불필요한 움직임이 많다.” 전 다음의 대화 내용을 들으며 베어 너클의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해봤습니다. “방금 코를 푼 것을 봤냐? 피가 너무 많이 흘러나와 숨을 쉬는 게 힘들 것이다.”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얼굴이 곤죽이 돼 피자판을 보는 것만 같다. 으깬 감자처럼 돼버렸다. 글러브를 착용하지 않으니 공격하는 사람이나 맞는 사람이나 피부가 쉽게 찢어져 큰 상처를 입는 것이다. 글러브를 착용했다면 지금 피를 흘리고 있지 않았겠지. 물론 글러브를 착용해도 피는 흐른다. 단, 저리 빠른 시점에 피가 흐를 일은 없었을 것이다.”
베어 너클이 베어 너클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맨주먹 대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마다 심지어 UFC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출혈이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이는 폭력성 수위를 기하급수로 높이게 되죠. 바꾸어 말하면 스트리트 파이트 시절 베어 너클 포맷을 유지하는 한, 마니아들을 끌어 모을 수야 있겠지만, 대중성을 얻기엔 태생적으로 글러먹은 콘텐츠란 소리.
BKFC(Bare Knuckle Fighting Championship)는 베어 너클을 미국 최초로 제도권 안으로 포섭한 단체입니다. 그 공식 첫 경기가 작년에 열렸으니, 베어 너클이란 종목에 있어서 2018년은 새로운 장을 의미합니다. 스포츠의 명멸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터, 이제 막 스포츠화된 베어 너클의 미래를 그리는 건 불가능하겠죠. 다만 더 많은 팬들을 모으고 파이를 늘리기 위해, 즉 협회는 살아남기 위해 현재의 규정을 계속해서 손질할 것입니다. 복싱이, K-1이, UFC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중에게 인기가 있을 콘텐츠다란 판단이 들면 여러 미디어가 달려들어 최대한의 서포트를 해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돈과 명예를 노리는 선수층의 양적 질적 수준도 높아질 테고, 팬들의 규모도 거대해지겠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베어 너클의 관계자들이 그 누구보다 다음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유명 UFC 해설자이자 동시에 격투기인이자 코미디언인 조 로건은 베어 너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위가 너무 높다. 대중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잔인하다.” 수위를 극단적으로 낮추면 베어 너클이 아닌 복싱이 되겠죠. 어차피 베어 너클이란 게 복싱의 초기 버전이며 원초적 버전이니까. 살아남기 위해 걸어갈 길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줄타기임을 예고합니다. 격투기의 팬이라면, 베어 너클이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난 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1. BKFC의 링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담아내기 위해 고안해낸 결과물입니다. 기둥은 둥글게 늘어서있고 네 줄의 로프로 둘러쳐졌습니다. 선수들은 항시적으로 서로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기 페이스가 빨라질 수밖에 없고, 결국 선수들로 하여금 공격적인 전개를 강제하는 형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격투기의 파놉티콘 버전이라 할까요? 링의 기둥을 보면 붉은색 기둥과 파란색 기둥이 눈에 띕니다. 여기에 선수들이 각각 위치하고, 매 라운드는 링 중앙 하얀 선에 위치한 채로 시작됩니다. 상대의 숨소리도 들릴 만치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노려본 채 시합이 시작되고 재개된다는 소리인데, 이는 19세기 베어 너클 시합의 주된 룰이었던 ‘브로튼 룰(the Broughton Rules)’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한편 제도권에 편입이 된, 아니 스포츠화가 이뤄진 베어 너클의 링을 보면 협회마다 그 형태가 다르단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 BKB(Bare Knuckle Boxing) 단체에 의해 이 원시 복싱이 주관되고 있습니다. 경기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선수들은 사각의 링에서 대결을 펼칩니다.
2. 브로튼 룰은 무엇인가. 영국으로 가겠습니다. 대략 16세기 초 베어 너클 복싱 형태가 등장합니다. 이 초기 복싱의 형태는 오늘날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주먹 싸움뿐 아니라 펜싱이라든지 곤봉을 휘두른다든지 하는 형태가 결합돼있었다네요. 참고로 1681년 1월 6일은 복싱 역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날입니다. 영국에서 열린 복싱 최초의 공식 시합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런던 프로테스탄트 머큐리 신문(the London Protestant Mercury)을 통해 복싱이란 단어가 처음 기록이 된 순간이기도 합니다.
브로튼 룰은 이 초기 베어 너클 경기의 룰입니다. 해당 규정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 원시 복싱과 관련한 일종의 성문법은 없었습니다. 체중차는 무시됐고, 정해진 라운드도 없었습니다. 심판도 없었고요. 1743년 당시 챔피언 잭 브로튼에 의해 소개된 복싱 최초의 룰입니다. 빈번하게 발생하는 선수들의 사망 사고를 줄이고자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 선수가 다운이 되고 30초 카운트 이후에도 경기를 재개할 수 없다면, 시합은 종료된다. 다운된 선수를 때리는 것과 허리 아래를 잡는 행위 모두 금지된다’ 등의 내용이 담겼습니다. 한편 브로튼 룰에선 선수들이 마상 시합이나 스파링 세션 등에 사용하는 장갑인 머플러(mufflers)의 사용을 장려했습니다. 강제성은 없었지만, 맨손의 사용이 선수들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염두에 둔다면, 역시나 선수 보호 차원에서 나왔던 것이겠죠. 참고로 현대적 의미에서의 복싱을 논할 때 그 첫 번째 규정집으로 1867년 출간된 퀸즈베리 룰(The Marquess of Queensberry Rules)을 들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러 선수들로 하여금 글러브의 착용이 의무화됩니다. 대략 이 시점부터 글러브를 착용하는 현대적 복싱과 글러브를 착용하지 않는 베어 너클의 본격적 분화가 시작되지 않았을까요?
3. 지금 베어 너클을 둘러싼 논란, 정확히 15년 전 UFC가 겪었던 갑론을박과 같습니다. 그래서 베어 너클의 미래를 너무 부정적으로 그리는 조 로건을 보고 있자니 내로남불이라 해야 하는지 아닌지.
4. 도대체 베어 너클 콘텐츠를 어떻게 접하게 됐냐고요? 유튜브에서 추천해줬을 뿐이고..
글쓰기 |
베어 너클도 기원을 따지면 고대 그리스의 판크라티온(Pankration)까지 거슬러 올라갈 겁니다. 그런데 이벤트로서의 흥행성과는 별도로 현대 일반시민 입장에서 바라볼 때 범죄로부터의 신변보호란 측면에서 이런 원시적 형태의 격투기 수련이 도움이 될지에 대해선 좀 회의적입니다. 대련의 장 자체가 일종의 제한된 공간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실제 길거리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서의 응용력은 오히려 제한될 수 있다고 보거든요.
개인적으로 비무장 상태에서의 자기방어술(ex. 크라브 마가, KFM, ...)에 관심이 있긴 하지만, 본문의 베어 너클류보단 좀 더 소프트한 기술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아주 치안이 막장이 아닌 이상 주먹질 한 번 잘못해도 폭행죄 등으로 입건되는 게 현실이니까요. 그리고 인간 심리에 대한 연구가 좀 더 진행돼 강함이나 폭력에 열광하는 요인이 명확히 밝혀진다면, 격투기 계열의 스포츠도 양상이 - 그냥 일종의 무용처럼 될 수도 있지만 - 바뀌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