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기] 오랜만의 카우보이 비밥
1.
어제는 오랜만에 TV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의 Blu-ray(이하 BD)를 시청했습니다. 다만 전편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세 에피소드(1화, 5화, 19화)만 봤지요.
이 세 에피소드는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이 가장 비밥다운 에피소드로 꼽은 베스트 3이기도 해서, DVD 시절 '컴필레이션 DVD vol.1'으로 묶여 나오기도 했습니다.(vol.2 는 팬들이 꼽은 베스트 3: 8, 17, 24화) 물론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이 세 에피소드가 본작의 주제 의식(과거, 현재, 꿈, 현실을 둘러싼 갈등)을 가장 군더더기 없이 보여준다고도 봅니다.
2.
필자가 생각하는 군더더기 없이, 라는 건 구체적으론 a. 깔끔하게 주제를 푸는 것에 집중하고, 구구절절 사연팔이를 하며 변죽을 울리지 않는다 b. 우울하든 신나든 일정한 페이스를 잃지 않고, 주제를 선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입니다.
a의 경우엔 카우보이 비밥이라는 애니메이션 자체가 쓸데없는 사연팔이가 없는 듯하면서도 있고 있는 듯하면서도 없는 딱 적당한 모양새- 어디까지나 필자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지만- 를 갖고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면 총 26편의 에피소드 중 몇 편을 제외하면 순서 없이 따로따로 즐겨도 크게 무리가 없는 옴니버스식 구성이지만, 전체 에피소드에 걸쳐 조각조각 던져지는 힌트들을 모아 보면 대충 이 친구는 과거에 뭘 잃었고 지금(작중 시간대) 삶에 결점이 있는 건 왜 그런지 < 를 언뜻언뜻 알 수 있게 해두긴 했습니다.
b의 경우 그렇다고 작중 주인공들이 가진 상실감, 갈등, 방황, 고민을 토로하며 한숨이나 쉬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걸 잊으려는 듯이 무리하게 밝고 활기찬 모습만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저변에는 늘 현재의 삶에 대한 일종의 체념을 깔고 있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현실에서 완전히 손을 놓은 것도 아닌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이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을 20년이 지나도록 생생하게 느끼게끔 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우리네 인생도 늘 밝은 것도 아니고 늘 어두운 것도 아니니까요.
3.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1/ 5/ 19화는, 위 2에서 언급한 사항들이 가장 극적으로 즐겁게 구현된다고 보는 에피소드들이라 좋아합니다. 개중에서도 둘만 꼽으라면 1, 19화이고/ 하나만 딱 꼽으라면... 우열을 가리기 힘드네요.
필자가 비밥의 TVA 26편 + 극장판 1편(극장판은 국내에 DVD까지만 정식 발매) 중에서 가장 많이 봤고,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 기억에 담아둔 건 이 두 에피소드입니다. 개중 그래도 무조건 굳이 하나만 고르라면 19화인데, 이유는
> 1화야 어쩌다 전편 감상해야지! 하고 심기일전하면 무조건 보게 되니까, 혹시나 그 이후 현재와 현실의 삶에 쫓겨서 다른 에피소드는 못 보고 주저 앉더라도 이미 본 것이 되니 재감상 카운트상 유리한데...
> 19화는 일부러 보려고 들지 않는 한 그럴 수가 없으니, 재감상의 순도(?)상 19화가 더 높기 때문에
그 19화의 자세한 내용은, 물론 따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의 즐거움을 뺏고 싶지 않고, 보신 분들과도 구구절절 이야기팔이 없이 이심전심 통하는 부분을 느끼고 싶어서이고요. 대신 굳이 말꺼내놓고 이렇게 보내기 아쉬워서 덧붙인다면, 이 19화는 '사람이든 기계든, 노장도 노장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메시지를 꽤 유머러스하게 풀어간 에피소드입니다. 동시에 주인공 스파이크의 삶에 대한 초연함 같은 것도 잠시 묻어나오고 해서,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었네요.
4.
물론 이런 이야기는 모두 필자 개인적인 감상이므로, 다른 분들은 또 다르게 느꼈을 수 있거니와 달리 더 좋아하는 에피소드들도 여럿 꼽히리라 봅니다. 당장 1에서 언급한 팬들이 꼽은 베스트 3도 감독과는 다른 세 편이고요.
하지만 필자가 좀 더 간단하게 카우보이 비밥이란 애니메이션 자체를 좋아하는 이유를 적는다면, 모든 에피소드들이 따로따로 연결 없이 흘러가며 각자의 매력을 따로 뽐내는 것 같아도 > 결국 흘러흘러 가다보면 큰 흐름이 모여 마지막에 착실하게 다다르는 것 역시, 우리네 인생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좋아하는 에피소드나 좋아하는 이유는 모두 달라도, 아마 이것만큼은 비밥 팬분들이라면 큰 줄기로 공유하는 감각이 아닐까 싶네요.
그런고로 2차 매체를 가지신 분들이라면 디스크로, 그게 아니라도 N사 등에서 언제든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고 있으니 보신 분이든 안 보신 분이든- 저런 감각이 마음에 드신다면 한번 즐겨 보시길 권합니다. 주의할 것은 (N사에서 단독 스트리밍 서비스하는)실사판 드라마는 웬만하면 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필자 개인적으론 한두 에피소드 정도는 살짝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즐겁게 봤습니다. 하지만 역시 기왕이면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을 보는 걸 권합니다.
그럼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디지털 프로젝터에 블루레이 말고, VHS를 브라운관 TV에 돌려 비밥의 정취를 새롭게 느껴보겠어요 < 이런 이야기는, 아무리 구닥다리 갬성을 가진 필자라도 당장 브라운관 TV 멀쩡한 게 없어서 할 수 없고요.
그래서 그대신, 모형 LP를 손으로 돌려가며 분위기만 잡아볼까 합니다. 이런 가짜 갬성 같으니라구! 하신다면, 사실 '카우보이 비밥'도 작중에서 '카우보이'란 단어를 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낮잡든 자조하든 그냥 소개하든 늘 '현상금 사냥꾼' 정도로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무슨 의미에서?), 필자도 비밥ism을 잘 구현하는 것이라고 맘대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You're gonna carry that we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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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YOU SPACE COWBOY... 극장판 블루레이 정식 출시만 기다리고 있네요.